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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12장 깽판 경로잔치(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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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12장 깽판 경로잔치(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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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소연이랑 손가락을 걸고 다시 만난 약속을 한 것은 그리 나쁘지 만은 않았다. 그렇지 않음, 무거운 짐 하나를 진 채 이 동네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던 중 마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멀리 키 큰 느티나무가 서있는 마을회관 마당에 흰 천막이 보였다. 분위기를 돋우려고 그랬는지 느티나무와 천막을 이어서 만국기까지 매달아 바람에 팔랑거리고 있었다. 느티나무 아래 한쪽 길가엔 커다란 검정색 세단과 봉고차가 줄을 지어 서있었다. 나무 아래에 삼인조 벤드까지 보였다. 빨간 양목을 입은 언젠가 동묘 앞에서 보았던 광대들처럼 늙수룩한 사내 하나가 건반 반주에 맞춰 섹스폰을 불어대고 있었고, 그 옆에는 긴 가발을 쓴 말라깽이 사내가 전자 기타를 치고 있었다. 아침부터 들렸던 스피커 소리는 그들이 연주하는 것이었다.

천막 아래 펴놓은 앉은뱅이 탁자엔 사람들이 빙 둘러 앉아 있거나 서있는 게 보였고 음식을 나르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도 보였다. 마을이 가까워오자 스피커 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임시로 설치해 놓은 화덕 위 커다란 솥에서는 무엇을 끓여내는지 풍성한 김과 함께 고기 삶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며 하늘 높이 퍼져가고 있었다. 노인네들은 노래 반주 보다 자기들 끼리 떠든다고 더 시끄러웠다. 이윽고 음악 소리가 그치자 누군가가 마이크를 잡고 나와 한껏 목청을 다듬은 다음,
“아아, 마이크 실험 중. 마이크 실험 중. 에~, 살구골 어르신들, 인근 마을에서 오신 여러 어르신들, 이렇게 좋은 날에, 쬐금 덥긴 합니다만, 이렇게 함께 자리 해주신 것에 대해 특별히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하고 드디어 오늘 행사를 알리는 말을 시작했다. 눈이 이마 쯤에 붙은 데다 코끝이 화살촉처럼 뽀족하게 생긴 약간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양복쟁이 사내였다. 하림은 소연이랑 멀찌감치 서서 그의 말을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에~, 저는 요번에 여기 들어설 <차차차 파라다이스>의 영업부장을 맡고 있는 조아무개라고 합니다.” 자기 소개를 한 사내는 땅바닥에 이마빼기가 닿을듯이 넙죽히 절을 올렸다. 그런 다음, 목청을 다시 한번 가다듬고 나서 본격적으로 말을 이었다.

“에~, 오늘 날도 쾌청한 것이, 차암 좋죠? 이게 다아 우리 살구골 잘 되라는 뜻인줄 알고 감사를 드리고, 이번에 이곳에 들어올 <차차차 파라다이스>의 미래를 위해 먼저 건배의 잔 한번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여러 어르신들 앞에 놓인 잔 한번 높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여기저기에서 순 취한 작자들이 술잔을 들자 자기 역시 막걸리가 넘쳐나게 담긴 잔을 높이 들고는 ‘위하여!’를 힘껏 외쳤다. 그에 맞추어 삼인조 악단의 팡파레 역시 커다랗게 울려퍼졌다.
“감사, 감사 합니다! 자아, 여러분! 차려진 것은 별루 신통찮을지 모르지만 저희 <차차차 파라다이스 사장님의 성의로 생각하시고 맛있게 드셔 주시고 건강하게 오래 오래 장수하시기 바랍니다. 드시면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장차 이곳에 들어설 <차차차 파라다이스>가 어떤 데냐? 고건 조금 있다가 우리 사장님께서 직접 말씀 드리겠습니다만, 한마디로 이 낙후한 골짜기가 비까번쩍하게 바뀌게 될 거라는 점만은 분명히, 예,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삐까번쩍한 시설이 들어온다 해도 주인은 바로 오늘 여기에 오신 여러분들입니다. 그렇죠.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참여와 동의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계획도 그림의 떡이요, 낙동강의 오리알이 되고 말 운명일 것입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김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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