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디자이너 1세대 '노라노' 다룬 다큐멘터리 개봉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내게는 그것보다 신성한 의무인, 나 자신에 대한 의무가 있다"라고 노라가 말한다. 집을 나가겠다는 아내에게 남편이 "아내와 어머니로서 신성한 의무"를 강요하며 다그치자 노라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다. "무엇보다 우선 내가 하나의 인간이란 사실이 중요하다"고 외치는 노라는 저 유명한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바야흐로 지금으로부터 66년 전인 1947년, 당시 갓 스무살을 넘긴 노명자는 고국 땅을 떠나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한국 여성으로는 두번째 비행기 승객이었다. 디자인 공부를 위해 미국에 도착한 노명자는 영어 이름이 필요하다고 하자 자신의 이름을 '노라(Norah)'라고 짓는다. 여학교 때 영어 원서로 읽었던 입센의 작품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미 2년간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열아홉의 나이에 이혼을 경험한 그는 '노라'보다 더 적확한 이름을 찾기도 어려웠을 터였다.
31일 개봉하는 다큐영화 '노라노'는 우리나라의 '패션'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라는 물음에서 출발한다. 지난해 용산참사를 다룬 다큐 '두개의 문'으로 화제가 됐던 연분홍치마가 제작을 맡았다. 영화는 지난해 열린 '노라노 60주년 기념 전시회'인 '라 비 앙 로즈'를 준비하는 과정을 큰 줄기로 삼는다. 16일 서울 건대 롯데시네마에서 열린 시사회에 참석한 노라노 선생은 "내가 현재 만 85세인데, 30대 후반의 손녀딸 벌 되는 애들이 와서 영화를 찍겠다고 했는데, 믿음직스럽지 않더라. 근데 3년을 따라다니는 것을 보고 그냥 내버려뒀다"고 말했다.
여전히 곱게 눈화장을 하고, 속눈썹을 정성스럽게 붙인 그의 모습은 우아하고 화려하지만, 디자이너로서의 60년의 세월을 견뎌낸 그의 손은 끊임없는 가위질에 굳은 살이 박히고, 바늘에 찔려 상처투성이였다. 그는 이혼녀의 신분으로 그 당시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고 털어놓는다. 패션계라는 화려한 세계에서 중심을 지키는 것 또한 힘든 일이었다.
이 기념 전시회를 준비했던 서은영 스타일리스트는 "코코 샤넬, 소니아 니켈, 비비안 웨스트우드 등과 같은 선상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내 나라의 디자이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현실이 슬펐다"고 말한다. 가수 윤복희는 "노라노 선생은 옷을 통해 사회의 고정관념을 확 뒤집어버렸다"고 찬사를 보내고, 배우 엄앵란은 "감독은 연기자를 연출하지만, 노라노 선생은 전체 의상을 연출했다. 대중문화의 기수였다"고 고백한다.
노라노 선생은 지난해에 이어 내년에도 기념 전시회를 한 번 더 열 생각이다. 주요 단골들이 전시를 위해 선뜻 기증한 옷들과 본인이 가지고 있는 400여벌의 옷들은 그 자체로 대한민국 패션의 역사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착각하고 있는데, 패션은 예술이 아니라 산업이다. 나는 장인이고 기술자다. 여기에 예술성을 더할 순 있지만 예술은 아닌 거다. 아까 내 인생이 '장밋빛 인생'이 아니라고 말했는데, 어느 의미에서는 장밋빛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으니까."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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