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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7장 총소리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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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7장 총소리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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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연이를 못보고 돌아 선 게 못내 서운하긴 했지만 꿩 대신 닭이라고, 그 와중에 이층집 여자를 다시 만난 건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지난 번 저수지 둑길에서 지나칠 때와는 달랐다. 이번에는 제대로 만난 것이었다. 그녀는 코너에 몰려 있었고, 그 순간 하림이 구세주처럼 나타났던 것이다. 생각만 해도 흐뭇했다. 자기가 왜 그때 그 순간, 험악한 판에 불쑥 끼어들 용기를 났는지 스스로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마 윤여사 고모할머니의 악다구니 막말 앞에 하얗게 질려서 무방비 상태로 서있던 그녀에 대해 순간적인 연민이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분함과 억울함을 참느라 입술까지 파르르 떨고 있었다. 하림의 눈과 마주치자 하림이 무언가를 알고 있기라도 한 양, 에스오에스를 보내는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던 것이다.
순간 하림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었다.
‘그 여자 분에겐 죄가 없어요.’

마치 판사가 최종적인 판결을 내리듯 간단하고 명료한 한 마디였다. 그 한 마디에 윤여사 고모할머니는 물론 그곳에 모여있던 동네 노인네들의 소란이, 비록 짧은 순간이긴 했지만 물을 끼얹듯 잠잠해져버렸던 것이다. 그때 자기를 바라보던 이층집 여자의 눈빛을 하림은 잊을 수가 없었다. 놀람과 감사가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화실로 돌아가는 길에 하림은 그 장면을 수없이 리와인드 해보고 곰씹어보며 스스로 만족해하고 있었다.
‘그 여자 분에겐 죄가 없어요.’
얼마나 통쾌한 한마디였던가.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나 차분하고 강력한 한마디였다. 그 순간 자기의 모습은 마치 서부 영화의 한 장면 같았을 지도 모른다. 악당들이 활개치는 타운에 나타난 서부의 사나이.... 그리고, 그가 던지는 정의의 한 마디.... 그리고, 경탄과 선망의 눈으로 그 사나이를 바라보는 둥근 통치마를 입은 아리따운 아가씨의 눈빛....
그다지 아리땁지는 않았지만 조금 전 이층집 여자의 눈빛이 그랬다
그녀는 막다른 골목에 빠져든 생쥐와 같이 불쌍한 처지였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때 자기가 나타났던 것이다. 절묘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만일 소연이가 그 장면을 보았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가게 창문 사이로 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림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자아 도취에 빠진 채 돌아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켠에 여전히 불안한 그림자가 가시지 않고 남아 있었다.

어쨌거나 총소리가 났고, 개가 죽었고, 죽은 개를 끌고 이층집 영감 울타리 앞에 던져두고 가는 사건이 있은 건 사실이었다. 바로 어젯밤에.... 그리고 자기가 바로 그 목격자였다. 문제는 그 사실을 내어놓고 함부로 말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여자분에게 죄가 없어요.’라는 말은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누구냐? 라는 질문은 또 달랐다. 거기엔 증거가 필요했고,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댈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자기가 목격자 겸 증인이 되어 나설 경우 자기도 모르게 걷잡을 수 없이 이 복잡한 일에 깊숙이 발을 담그는 꼴이 되고 말 것이었다. 여기저기 불려다니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야할 것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팠다. 그런데다 만에 하나 자기가 잘못 짚었다면 보통 일이 아닐 것이었다.

이런 경우는 그저 모르는 척, 못 본 척, 넘어가는 게 상책일는지 모른다. 그런다고 누가 욕을 하거나 비난을 할 일도 없을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일어난 일은 어둠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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