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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1장 동묘(東廟) 부근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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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1장 동묘(東廟) 부근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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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윤여사, 말해 봐요. 하림이 저 시인 친구, 맘에 들어?”
동철이 술잔을 놓고 흑돼지 조각을 집어 들며 말했다.
“왜? 소개시켜 주려고? 벌써 다아 끝났는데....?”
윤여사가 능청을 떨었다.
“어머. 그러셔. 빠르기도 하셔라.”
동철이 놀리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 오늘 저녁에 눈도 내린다고 하고, 선거도 끝나고 해서 불렀다. 기분이 그렇잖니? 이게 반장선거처럼 이긴 놈이나 진 놈이나 한판 축제처럼 지나가야 하는데, 어찌 된 판인지 그게 아니거든. 그 놈의 선거 땜에 여러 사람 마음 다치고 돌아섰어요. 지난 87년 대선 끝나고 DJ 영국 떠날 땐 그래도 그땐 괜찮았어. 그런데 이번은 아니냐. 막말에다, 막소리까지, 온통 똥 뒤집어씌우듯이 해놓았으니, 이긴 놈이나 진 놈이나 마음이 편할 리가 있겠나? 안 그래? 하아, 정말 대한민국 이러면 안 돼요.”
동철이 초반부터 국회의원 촉탁님답게 거창하게 시작했다.
“암흑기야. 캄캄한 암흑기. 일제시대, 해방 공간도 이러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흔히 일제 시대를 우리 역사의 암흑기라 하지만 그게 아니야. 일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도 적어도 우리처럼 좀팽이들은 아니었어. 안중근 의사나, 아리랑에 나오는 김산, 압록강은 흐른다에 나오는 이미륵이 같은 사람 봐. 그들 얼굴엔 자존심이 있잖아. 그래. 적어도 그들은 자존심이 있었다구. 나라를 빼앗기고 돌아다니는 신세였지만 그래도 인간적인 자존심, 품격 같은 것은 있었거든. 그런데 지금 우리들 한번 돌아봐. 자존심 있는 인간들이 어디 있나? 품격 있는 인간이 어디 있나? 좀팽이들 세상.....사나운 원숭이들.... 안 그래? 내 말 틀렸어?”
오랜만에 듣는 개똥철학자의 열변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무언지 모르게 뒤숭숭해 있는 터라 그런지 갑작스럽게 그의 말이 신선하게 들렸다.
“그런 자존심 있고, 품격 있던 얼굴들이 사라졌어. 목사고, 교수고, 시인이고 상관이 없어. 잘 살아보세, 소리치며 달려오는 동안에 모두가 양아치처럼 변해버렸거든. 그러니 서로 간에 막말을 막 해대는 거지. 자기 얼굴에 똥칠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고 말이야. 정말 요즘 같은 땐 뉴스 보기가 겁이 나요. 사람 만나기도 싫고....”
개똥철학자는 정말 진저리라도 치는 시늉을 하였다.
“난 그래서 말인데, 망명정부 하나 차리기로 했다. 망명정부 수반 황동철. 어때 괜찮지? 낼부터 명함 파서 들고 다닐 생각이야. 퍼스트레이디로 윤여사를 임명하구......”
“호호. 아이쿠, 고마우셔라. ”
윤여사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곧 달라이 라마한테 가서 혹시 부근에 빈집 하나 없는가, 알아봐야겠어. 같은 망명정부 수반끼리 회포도 좀 나누고.... 세계 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위한 기도도 함께 드리고.... 아, 망명정부. 내 마음의 망명정부. 이 짐승들의 세상에서 탈출한 자유의 왕국.”
동철이 장난스럽게, 그러나 간절한 표정으로 마치 대사라도 읊듯이 말했다.
“근데 퍼스트레이디도 임명직임감?”
윤여사가 붉은 입술을 앞으로 내어밀며 놀리듯이 말했다.
“아, 그런가? 그럼 나랑 결혼하지, 뭐. 수반 부인이 되면 되잖아? 꿩 먹고 알 먹고....”
“에게게. 그럼, 지금 부인은 어떡하구?”
“망명정부에선 지금까지 있었던 건 모두 무효야. 원천 무효라구! 모든 게 출발이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동철이 술잔을 들며 호기롭게 소리쳤다.



글 김영현/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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