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선 사건은 1976년 10월 24일 미 ‘워싱턴 포스트’지가 “박동선이라는 한국인이 한국정부의 지시에 따라 연간 50만 달러에서 100만 달러 상당의 현금을 90여명의 미국 국회의원 등 공직에 대해 매수공작을 했다”고 1면에 대서특필하면서 불거졌다.
방송에서는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과는 달리 그 이면의 새로운 증언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먼저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근본적인 배경은 하비브 주한 미대사와 박동선의 워싱턴 정가 고위층 인맥을 배경으로 한 거침없는 로비 활동이라는 개인적인 갈등 관계에서 비롯된다.
당시 아시아를 둘러싼 국제 정세도 갈등을 부채질한다. 월남전 패망과 닉슨의 괌 독트린, 카터 정부의 주한미군 철수로 촉발된 박정희 대통령의 안보 위기와 한미 갈등, 주한미군 철군론을 잠재우기 위한 박정권의 절체절명의 대미 로비의 필요성이 있었다.
또한 미 의회 로비스트로 국제적인 사기꾼으로까지 매도당했던 박동선의 당시 괴로웠던 심경과 미륭상사로 당시 국내 10대 재벌에 속했던 선친의 재력과 자녀 교육관,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 과정과 정일권 당시 총리와의 인연, 조지 타운대학교 입학 과정, 미 대학 역사상 처음으로 한인 학생회장에 출마하게 된 계기와 헬기로 선거 운동을 벌였던 에피소드, 또한 사교 클럽인 조지 타운클럽을 세우게 된 계기와 그의 야망 등이 진솔하게 다루어진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박동선 사건이 매듭을 짓자 “앓던 이빨이 빠진 것처럼 속 시원하다”고 말했을 정도로 이 사건이 몰고 온 파장은 카터 행정부의 인권 외교와 맞물려 한미 관계를 뿌리 채 흔들며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갔다.
제작진은 “코리아게이트 사건은 당시 허약했던 우리외교의 토양과 치부를 드러낸 미숙했던 로비 활동의 씁쓸한 이면사”라며 “방송에서 공개되는 박동선 비망록을 통해 당시 한국정부가 얻은 것은 무엇이며, 또 잃은 것은 무엇인지 역사적인 교훈도 돼 새겨 볼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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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완 기자 sta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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