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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나무골편지]저 꽃잎들의 하염없는 貴天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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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는 꽃이 아름답다.
 바람과 햇빛에 정갈하게 몸을 씻은 다음
 날개를 펴는 소멸의 가뿐함이 부럽다.  

 저 꽃잎들의 하염없는 貴天이여.
 
텃밭에서 삽질하는 동안 왕벚꽃잎이 분분히 날렸다. 마른 흙 먼지도 풀풀거렸다. 도대체 비가 언제 내린다는 거야.
그렇게 흙을 뒤집어 상추, 쑥갓, 아욱, 근대 등 몇가지 씨앗을 뿌렸다. 참외, 수박, 오이, 고추, 고구마, 옥수수 등은 모종을 사다 5월초에 심을 생각이다. 비록 그렇다쳐도 파종하기에 한참 늦었다. 아직 시간을 놓친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게으름을 피운 것이다.
 
상추는 내게 성공과 실패를 동시에 안겨준 채소다.
 
어느 해 나는 얼음 풀리자마자 상추씨를 뿌렸다. 그러나 너무 이른 탓에 상추는 4월말이 돼서야 싹을 튀웠다. 그나마 아주 드물어 숫자를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결국 모종을 다시 심었다. 상추의 파종 시기는 3월 중순이다. 잣나무골이 서울보다 2도 정도 낮은 것을 감안하면 사실 파종 시기는 3월말이 적당하다. 나는 욕심을 부렸던 것이다. 그런 일로 이웃들에게 '헛농사꾼'이라고 놀림을 받았다.
 
어느 해 여름 장마 이후에 먹겠다고 6월말 뜨거운 뙤약볕속에서 파종했다. 불타는 땅에 뿌린 씨는 끝내 싹을 튀우지 못했다. 가을 상추를 먹으려면 8월말에 심는게 적당하다. 아침 저녁으로 약간 찬바람이 들려고 하는 시간이 파종하는 때다. 나는 상추의 섭리를 여러 차례 거역하고서야 시간과의 타협을 가질 수 있었다.
 
어느 해 좀 과장이기는 하나 적상추잎을 쟁반만하게 키운 적이 있다. 상추는 아예 나무처럼 자라서 내 키만해졌다. 내 친구는 "상추가 무슨 아열대식물인가 ?"하고 의아하다는 표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상추 잎이 너무 커 입에 대려 하지 않았다. 상추를 씹으면 물이 꽉차 '아싹아싹' 소리가 났다. 맛은 싱아처럼 비릿했다. 쌉쌀함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몇차례 겉절이해 먹고는 나도 포기했다.
 
어느 해 나는 손바닥 크기만하게 상추잎을 길렀다. 상추의 발육을 최대한 억압해 잎이 작게 했다.밥과 고등어 한토막, 저민 마늘을 싸서 한 입이 쏙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상추 잎이 자라지 않게 아주 조밀히 심으면 잎이 크지 않다. 먹기는 아주 적당하다. 그런데 문제는 장마에 상추들이 적응하질 못한 것이다. 상추들이 서로 몸을 맞대고 서 있어 바람이 흐를 틈조차 없어 한꺼번에 썩어버렸다. 아니면 이들이 한꺼번에 자폭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해 나는 아버지 약국에서 한약 찌꺼기 여러 푸대를 가져다 퇴비로 썼다. 상추는 아주 잘 자랐다. 잎도 탄탄하고, 맛도 더 진했다. 실제 한약 냄새가 은근히 풍겨 친구들에게 나눠줄 때마다 자랑을 늘어놓곤 했다. 한 여름 상추밭에 다가서면 바람결에 은은한 향기가 났다. 한약내 나는 상추가 좋았다.
 
나의 상추심기는 여러 해동안에 걸쳐 실패와 성공을 반복해왔다. 그저 때 맞춰 널널히 키우는 것이 정답이련만..꼭 쓴 맛을 봐야 깨닫는다. 사람의 이치도 그렇다. 적당한 시간과 관심이 있어야 한다. 지나친 간섭, 무관심 모두 사람을 해치는 것들이다. 그러나 상추에게서 나는 아직 제대로 배운 것은 없는 것 같다. 아이들이나 후배들을 대하는 것이 상추 키우기처럼 여전히 내 멋대로다.
 
퇴비는 주로 돼지 똥을 삭힌 돈비를 쓴다. 대신 화학비료는 쓰지 않는다. 돈비는 밑거름으로도 훌륭하다. 파종하는 경우 돈비를 조금만 넣어야한다. 돈비 덩어리속에 씨앗이 박혀 있으면 싹을 튀우지 못 한다. 덩어리속에 공기가 차 있어서다.

모종을 심을 경우도 마찬가지다. 돈비 덩어리 위에 모종을 심으면 그대로 말라버린다. 돈비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기 때문이다. 거름을 쓸 때는 항상 조심스럽다. 돈비와 흙을 적당히 섞고 그 위에 씨를 뿌렸다. 늘 하던 방식이다. 대신 올해는 고랑을 깊게 팠다. 최근 여름철 장마가 길어 물이 빠지지 않아 농사를 망치는 경우가 많다. 가장 신경 쓰이는 대목이 배수다. 채소는 물이 잘 빠져야 잘 자란다.배수가 잘 돼야 병충해를 덜 입는다. 질척한 밭에 늘 물이 고여 있으면 채소들이 썩는다.
 .
상추는 씨앗을 뿌린 것 말고 20그루의 모종도 심었다. 먼저 먹을 채소를 얻기 위해 항상 상추만큼은 모종과 파종을 함께 한다. 모종에서 얻은 야채를 다 먹을 때쯤 파종한 상추를 수확할 수가 있게 된다. 늦게 파종하는 대신 상추 수확기간을 늘리기 위한 편법이다.
 
아침부터 일군 텃밭이래야 겨우 10평 남짓이다. 그나마도 숨 찼다. 벌써 힘이 부친다. 밭에 씨 뿌리는 동안 아내와 평강이는 온천엘 가고, 금강이도 친구들 전화받고 나갔다. 그래도 일손을 돕는 것은 아들녀석 뿐인데...축구라면 사족을 못 쓰니...
 
"빨리 일 마치고 민들레 겉절이를 만들어야지."
나는 일손을 서둘렀다. 멸치 액젖에 부추와 민들레를 섞어서 만든 겉절이는 봄에 먹는 특별한 음식이다. 쑥국처럼 말이다. 민들레 겉절이는 막 피어난 노란 꽃술과 대궁도 그대로 넣고 적당히 간을 맞추면 된다. 쌉쌀한 맛은 혀의 감각을 깨운다. 나는 일손을 놓고 쉬는 중간중간 마당에 번지기 시작한 민들레를 캤다. 한 그릇 정도 되겠지 ?
 
그러는 동안 어느 한 순간이 떠올랐다.
 
나는 어느 비 내리는 날 아침 출근도 잊은 채 창가의 빗줄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제 나무 심으니 오늘 비 내리네.세상이 항상 내 뜻과 어긋나는 줄만 알었더니
이렇게 조화로운 날도 있네."
아내가 웃었다.
"꼭 노인네처럼...출근이나 하시지 ?"
 
내일은 곡우인데..비 내렸으면 좋겠다.


추신:벗들, 편지를 써놓고도 늦게서 보낸다. 그새 곡우가 지나고 비도 내렸다. 모두들 단비에 젖어 행복한 봄날을 보내라.
 

이규성 기자 peac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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