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배연석의 Cine Latino]네루다(2016)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배연석의 Cine Latino]네루다(2016)
AD
원본보기 아이콘

[배연석의 Cine Latino]네루다(2016) 원본보기 아이콘



도망치는 천재 시인과 그를 쫓는 경찰의 추격전, 그리고 주연과 조연으로 나누어지는 인생의 아이러니.
세계가 주목하는 칠레의 영화감독 파블로 라라인(42)의 영화 두 편이 최근 국내에서 나란히 개봉했다. 공교롭게도 두 편 모두 실존했던 두 인물의 전기 영화이다. '재키(2016)'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 케네디의 이야기이고, '네루다(2016)'는 1971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20세기 대표 시인 파블로 네루다에 관한 작품이다.

대부분의 전기영화들이 한 인물의 성장 과정 속에서 좌절과 성공하는 모습들을 나열하듯 보여 주는 반면 파블로 라라인의 작품들은 그와는 차별되는 독특한 연출이 상당히 흥미롭다. 예컨대 영화 네루다는 칠레의 시인이자 정치가 파블로 네루다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 아니다. 시인으로 큰 명성을 얻었던 20대의 빛나던 시절이나 대통령 출마와 노벨평화상 수상 그리고 당시 독재자였던 피노체트에게 시달리던 말년의 삶을 조명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에서는 세계적 시인 네루다의 성공담이나 그가 살아온 인생의 업적 등은 전혀 볼 수가 없다. 오히려 몇몇 장면들에서는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한심하거나 괴팍한 사람으로 묘사되기까지 한다. 라라인 감독의 이런 선택은 네루다라는 인물을 잘 알지 못해도 그의 시나 소설들을 접하지 못한 관객들도 영화 자체로 즐길 수 있게 만드는 장점이 된다.
영화는 1948년 네루다가 상원의원이던 시절 권력에 저항하며 대통령 곤잘레스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연설 이후 '빨갱이'로 낙인찍혀 전국에 수배령이 내려지고 공산당원들의 도움으로 도피 생활을 하면서 시작한다. 대통령은 유능한 경찰 간부 오스카를 불러 네루다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후 영화는 도망치는 네루다와 그를 체포하려는 오스카의 추격전으로 진행된다. 항상 네루다가 있던 공간에 한 발짝 늦게 도착하는 경찰 오스카는 네루다가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남기는 소설을 읽게 되고, 그와 연관된 사람들을 만나고 취조하면서 서서히 그에게 매료되고 동화되는 듯하다.

그렇게 자신이 잡아야 할 사람의 예술적 가치와 사상을 깨닫게 되고 설득되어 가는 이야기이구나 싶을 즈음 영화는 예상치 못하게 한발 더 나아간다. 영화 중반 더 이상 함께 도망치지 못하고 홀로 남겨진 네루다의 아내를 체포하기 위해 찾아간 오스카는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네루다가 만든 이야기속의 조연일 뿐이라는 이야기에 묘하게 설득되지만 자신이 조연이라는 말을 용납할 수는 없다.

이때부터 오스카라는 인물이 실재인지 허구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전개가 이어지며 영화는 로드 무비의 형태로 바뀐다. 칠레 남단을 통해 국경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도주하려는 네루다와 오토바이를 타고 뒤쫓는 오스카. 두 사람은 우여곡절과 설원에서 펼쳐지는 추격전 끝에 마침내 대면한다. 네루다의 줄기찬 도주는 스스로 민중을 이끄는 리더라고 믿은 사나이의 옳은 선택이었을까. 그리고 영화 내내 네루다를 쫓는 오스카는 그에게 도달함으로써 주연이 되었을까.

네루다는 영화가 끝난 다음 한참 동안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 영화다.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른 해석을 낳을 수 있는 아주 흥미롭고도 수수께끼 같은 작품이다. 또한 칠레의 암울했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정치와 예술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파블로 라라인 감독의 다른 영화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연출기법인 긴 대화 장면, 인물과 대사는 연속성이지만 공간이 갑자기 변하는 점프 컷들은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듯 묘한 여운을 남긴다. 가상 인물인 경찰 오스카의 내레이션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 또한 네루다라는 인물을 3자 입장에서 관찰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영화 속에 잠깐 잠깐 소개되는 네루다의 시집 '모두의 노래(Canto General)'의 인용, 여러 장면에서 네루다 혹은 다른 인물들이 읊는 "오늘 밤 나는 가장 슬픈 시를 쓸 것이다"로 시작되는 사랑에 관한 시 구절들은 네루다의 문학작품을 찾아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한다. 1948년의 칠레를 재현한 세트와 영화 말미의 주 로케이션인 칠레 남단의 안데스 산맥을 배경으로 한 자연 풍경 또한 볼거리다. 영화 '바벨' '수면의 과학' '눈먼 자들의 도시'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등 대작들에 출연하며 이미 세계적 배우의 반열에 오른 오스카역의 멕시코 배우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40)과 네루다역을 맡은 칠레 국민배우 루이스 그네코(56)의 훌륭한 연기 또한 영화에 몰입감을 더한다.

파블로 라라인 감독은 1976년 칠레 산티아고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는 정치인이다. 2006년 영화 '푸가'로 데뷔했으며 '토니 마네로(2008)'를 통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 작품은 '토요일 밤의 열기'에서 존 트라볼타가 연기한 '토니 마네로'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라울이라는 극악무도한 주인공을 내세운 파격적 작품이다. 그는 이후 '노(2012)' '더클럽(2015)' 등의 화제작들을 연달아 연출해 유수영화제에 초청되고 수상했다. 2016년에는 재키로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르는가하면 네루다로 칸영화제 감독 주간에 초청되는 등 비평과 흥행 모두 호응을 받으며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

배연석 객원기자

배연석 객원기자

원본보기 아이콘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하이브-민희진 갈등에도…'컴백' 뉴진스 새 앨범 재킷 공개 6년 만에 솔로 데뷔…(여자)아이들 우기, 앨범 선주문 50만장 "편파방송으로 명예훼손" 어트랙트, SBS '그알' 제작진 고소

    #국내이슈

  • 美대학 ‘친팔 시위’ 격화…네타냐후 “반유대주의 폭동” "죽음이 아니라 자유 위한 것"…전신마비 변호사 페루서 첫 안락사 "푸바오 잘 지내요" 영상 또 공개…공식 데뷔 빨라지나

    #해외이슈

  • [포토] 정교한 3D 프린팅의 세계 [포토] '그날의 기억' [이미지 다이어리] 그곳에 목련이 필 줄 알았다.

    #포토PICK

  • 신형 GV70 내달 출시…부분변경 디자인 공개 제네시스, 中서 '고성능 G80 EV 콘셉트카' 세계 최초 공개 "쓰임새는 고객이 정한다" 현대차가 제시하는 미래 상용차 미리보니

    #CAR라이프

  • [뉴스속 인물]하이브에 반기 든 '뉴진스의 엄마' 민희진 [뉴스속 용어]뉴스페이스 신호탄, '초소형 군집위성' [뉴스속 용어]日 정치인 '야스쿠니신사' 집단 참배…한·중 항의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