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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꼭 파리가 아니라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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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 코폴라 감독 '파리로 가는 길'

영화 '파리로 가는 길' 스틸 컷

영화 '파리로 가는 길'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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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앤(다이안 레인)은 귀가 아프다. 약을 먹어도 나을 수 없다. 남편 마이클(알렉 볼드윈)이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는다. 제작하는 영화에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아내가 벌인 일에도 사사건건 간섭이다. 호텔 영수증에 못마땅한 눈초리를 보낸다. "맙소사. 물 한 병에 12유로? 햄버거랑 치즈 샌드위치 두 개 금액이 청구됐어." "마누라가 치즈버거 하나 마음대로 못 먹게 해줄 거면 뭐 하러 그렇게 열심히 일해?" "낭비는 질색인 거 알잖아." 앤은 가볍게 웃어넘긴다. 남편에 관해서는 모든 것을 통달했다. 라이카C의 셔터를 누르고, 스도쿠 빈칸에 숫자를 채워 넣으며 공허함을 달랜다. 스도쿠는 외로운 숫자라는 뜻의 수독(數獨)을 일본식으로 읽은 것이다. 그녀는 텅 빈 마음을 채울 준비가 돼 있다. 파리에 거주하는 친구의 집 비밀번호도 '5238'이다. "쉰두 살 여자도 서른여덟 살 남자를 사귈 수 있다." 새로운 숫자가 나타났다. 서른여덟 살은 아니지만, 친절하고 박식한 프랑스 남자 자크(아르노 비야르)다.

영화 '파리로 가는 길'의 뿌리는 엘레노어 코폴라 감독(81)의 경험이다. 2009년 남편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78)을 따라 칸국제영화제를 찾았다. 동유럽 출장까지 동행할 예정이었으나 코감기에 걸려 비행기에 오를 수 없었다. 그녀는 남편의 오랜 사업 동료인 프랑스 남자의 제안으로 파리에 갔다. 일곱 시간 운전으로 족할 여정. 그러나 남자가 여러 가지 길로 안내하고, 자동차마저 숨을 거둬 40시간이 걸렸다. 영화에는 당시 코폴라 감독이 느낀 즐거움과 불편함이 모두 담겼다. 채색은 그녀가 올리브 나뭇가지와 같은 천연재료를 종이에 부착해 만든 멀티미디어 작품 '바로 그 순간 그 자리'를 닮았다. 프랑스인들의 평화롭고 여유로운 모습과 그들의 얼이 살아 숨 쉬는 문화를 라이카C에 담는다. 자크는 칭찬한다. "사소한 것들을 잘 잡아내네요. 영감이 넘치는데요. 다 보여주지 않으면서 전체를 상상하게 만들어요."
영화 '파리로 가는 길' 스틸 컷

영화 '파리로 가는 길'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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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출시된 푸조504 컨버터블이 달린다. 조수석 문이 안에서만 열리는 낡은 자동차지만, 자크의 온화한 미소처럼 정겹다. 칸, 비엔, 리옹, 바젤레이 등 방문하는 도시들도 소박한 옷차림으로 앤을 반긴다. 한적한 마을들은 하나같이 풍요롭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음식들이 주문을 기다린다. 앤은 '샤토 네프 뒤 파프'로 입안을 헹군다. 스무 종 이상의 포도를 블렌딩한 와인은 다음 잔의 맛이 다를 만큼 변화무쌍하다. 앤의 감정도 덩달아 들썩인다. 달콤함에 취하는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 이성을 되찾는다. 자동차에서 흘러나오는 모차르트의 현악4중주 '불협화음'처럼 불안정하고 긴장된 선율의 연속이다. 자크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처럼 그 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목적지도,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고 떠나는 척 해봅시다." 그에게 앤은 폴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이다. 세잔은 말년에만 이 산을 약 서른 점 그렸다.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탐구한 주제. 그곳을 함께 바라보면서 자크에게 앤은 특별해졌다.

본격적인 작업은 저녁식사에서 이뤄진다.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앤. 식탁에는 론 지방의 대표 와인 콩드리유와 도미구이, 꼬마채소를 곁들인 양고기, 강낭콩이 들어간 송아지 고기가 차례로 오른다. 자크는 향기와 맛을 음미하는 앤의 미소에서 슬픔과 공허함을 간파한다. 카사노바 뺨치는 재치와 교양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앤에게 그의 속사정은 중요하지 않다. 성숙한 매력의 여인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불편해하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에서 벗어나면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다.

영화 '파리로 가는 길' 스틸 컷

영화 '파리로 가는 길'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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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를 다섯 명이나 둔 코폴라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비슷한 힘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는 '지옥의 묵시록 제작기 노트(1979년)'·'삶에의 기록(2008년)' 등 저서 두 권을 남겼고, '회상, 지옥의 묵시록(1991년)' 등 다큐멘터리 열 편을 연출했다. 빛나는 이력에도 영화계는 저명한 영화감독의 아내이자, 재능 있는 감독들(소피아·로만)의 어머니로 규정하려 들었다. 코폴라 감독은 "앤은 딸을 다 키우고 인생의 중반 즈음에 서 있다. 서른 살이 되면서 조금 더 사색적으로 변했다"며 "남편이 자신의 인생을 만족스럽게 해줄 수 없다는 것, 그렇다고 다른 남자가 그것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행복은 자신에게 달렸다. 성장의 다음단계는 내면으로의 여행"이라고 했다. 꼭 파리가 아니라도 좋다. 삶의 사소한 즐거움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면, 그곳이 곧 파리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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