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사일런스'...순교와 배교 선택의 순간
17세기 일본의 가톨릭 탄압 영화화...88년作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속 흔들리는 예수와 닮은꼴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아버지, 저와 함께 하소서. 절 떠나지 마소서." 십자가에 묶인 예수의 손목에 못이 박힌다. 외마디 비명이 터지지만, 군중은 손가락질하며 조롱한다. 예수는 그들을 보며 혼잣말한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많은 영화감독들이 예수의 희생을 다뤘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마태복음(1964년)' 등 대다수 작품들은 그를 정갈하고 심지가 곧은 인물로 표현한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75)이 1988년에 만든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다르다. 예수를 완전한 신이면서 완전한 인간으로 그린다. 그 또한 인간의 모든 감정을 느낀다고 가정한 것이다.
동명 원작을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하느님이 삶이라는 선물을 내리신 것이므로 예수 또한 우리처럼 평범한 삶을 살고 싶은 유혹을 느꼈을 것이라고 한다. 스콜세지 감독은 그리스도가 하느님인 동시에 인간이었다면, 그의 희생이 지니는 의미가 무엇일지에 주목한다. 인간으로서 자처한 희생에서 예수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하느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그래서 그의 절절한 고뇌가 죽음에 대한 공포는 물론 평범한 사내의 현세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스콜세지 감독이 그린 예수는 다소 나약했다. 오히려 일부 제자들을 예수를 격려하고 포용할 만큼 강직하게 표현했다. 그들은 우리의 질문을 대신한다. 유다는 곡창에서 예수의 말에 경청한다. "어젯밤 이사야가 내게 찾아왔어. (중략) 내가 바로 양인거야. 내가 희생해야 돼. 십자가에 매달려야 돼." "그런다고 뭐가 좋은데?" 사일런스에서는 기치지로(쿠보즈카 요스케)가 묻는다. 그는 가족의 희생을 막기 위해 배교했다. 로드리게스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지만 다시 여러 번에 걸쳐 후미에(신자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기 위해 밟게 한 성화상)를 밟는다. 믿음이 결여돼 저지른 잘못이 아니다. 기치지로는 다른 민초들처럼 기독교의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에게 기독교는 고단하고 가혹한 삶을 위로받을 수 있는 유일한 창구에 가깝다. 이런 취약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 배교로 드러난다.
모든 것을 잃은 기치지로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의 죄를 씻어주는 로드리게스의 마음에도 유다는 존재한다. 자신 때문에 희생당한 신자들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면서도 일본을 떠나지 않는다.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가르페의 순교가 생각해온 명예로운 죽음과 다르게 다가온 뒤에야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그는 자신을 위해 기도한다. "저들의 목숨을 저에게 맡기지 마소서." 로드리게스는 배교하지 않으면 신자 다섯 명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의 음성을 듣는다. "네 고통을 안다. 어서 (후미에를) 밟아라. 이제 네 생명은 나와 함께 있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하느님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예수가 접한 사탄의 속삭임이거나 로드리게스가 자신의 배교를 합리화하면서 만들어낸 환청일 수 있다. 스콜세지 감독은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 역시 자신에게 계속 묻고 있다. "나는 평생토록 믿음과 의심, 나약함, 인간이 처한 상황 등에 대해 본질적인 해답을 찾고 싶었다. 사일런스는 그런 문제를 직접적으로 건드리지만, 이 역시 뚜렷한 결론을 말하기 어렵다."
그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만들었을 때처럼 건강한 토론의 장이 열리길 기대한다. "우리의 삶과 세상에서 예수가 상징하는 바와 기독교 정신의 정수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기회가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동안 만들어온 주옥같은 작품들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구원을 받지 못했다. '택시 드라이버(1976년)', '성난 황소(1980년)', '특근(1985년)', '좋은 친구들(1990년)' 등이다. 죄의식에 시달리며 구원을 요청하지만 끝내 희망의 빛을 보지 못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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