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극장 국정본 회장을 보내며...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영화 '박열' 촬영이 한창인 경남 합천 영상테마파크. "오케이"를 외친 이준익 감독(58)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어두웠다.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대한극장 국정본 회장이 별세했다는 비보였다. "얼마 전 찾아뵈었을 때만 해도 정정하셨는데…." 이 감독은 1988년부터 4년간 대한극장에서 마케팅을 했다. 협력업체 직원이었지만 국 회장과 인연이 깊다. "마케팅의 달인이셨어. 당시 광고를 주로 신문에 실었는데, 항상 가장 좋은 위치를 선점하셨어. 실무자를 옆에 두고 지시할 만큼 꼼꼼하셔서 아직도 고생했던 기억이 선해."
대한극장은 매일 구름관중이 몰려들었다. 특히 이 감독이 마케팅을 맡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77)의 '마지막 황제(1987년)'는 1988년 12월 23일 개봉해 4개월여 동안 75만 관객을 동원했다. 아카데미시상식에서 9관왕을 할 만큼 작품성도 뛰어났지만, 70mm 영사기와 이 필름을 원형 그대로 상영할 수 있는 가로 24m, 세로 19.5m의 초대형 스크린 등이 관객을 사로잡았다.
서울 중구 퇴계로에 있는 대한극장은 1956년 건립부터 20세기폭스사가 설계한 우리나라 최초의 무창 건물로 유명세를 탔다. 당시 최대인 1900여 개의 좌석을 설치했고, 국내 최초로 70mm 영사기를 도입했다. '벤허(1959년)',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년)', '사운드 오브 뮤직(1965년)' 등 작품성 있는 대작 영화들을 두루 상영해 충무로의 거점으로 자리매김했다. 상영 시설에도 많은 신경을 기울였다. 특히 국 회장은 음향 시스템에 조예가 깊었다. 조지 루카스 감독(73)이 1980년 개발한 THX 시스템을 국내에 처음 소개한 것도 그였다.
국 회장은 현장 경영으로도 유명하다. 이 감독은 "개봉 하루 전에 항상 객석에서 화질이나 볼륨을 점검했다. 실무진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까다로웠다"고 했다. 전호진 상무는 한 가지 일화를 전했다. "디지털영사기가 처음 도입됐을 때의 일이다.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2001년)'을 개봉일 전날 점검했는데 영사기 렌즈가 우리 상영관의 거리와 조금 맞지 않았다. 그냥 상영해도 무방했지만 국 회장님은 찝찝하셨던 것 같다. 개봉일 새벽에 영사 직원과 나를 부르시더니 렌즈를 구하자며 서울 시내 극장들을 모두 찾아가셨다. 일면식도 없는 관계자들까지 깨우는 우여곡절 끝에 영화를 최적의 영상 비율로 상영할 수 있었다."
대형 멀티플렉스 체인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대한극장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전 상무는 "상영관이 많은 장점을 활용해 다양한 색깔을 내는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 회장님이 생전에 이 때문에 고민이 많으셨다. 다른 극장에서 수용하지 않지만 관객이 찾는 영화가 있으면 무조건 상영하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이준익 감독은 "할리우드의 좋은 영화들을 많이 가져오셔서 관객의 눈높이를 높여주신 분이다. 국 회장님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영화 시장은 이 정도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 스크린의 거인, 고 국정본 회장의 명복을 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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