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신라 말기 유명한 문인이자 정치인으로 알려진 고운 최치원(崔致遠) 선생. 그가 중국에 이름을 날린 것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쓴 이후다. 이 글은 당나라 멸망의 직접적 원인으로 지목되는 '황소의 난' 때 최치원이 토벌군 모집을 위한 격문으로 쓴 글이다. 이 글을 읽고 황소가 너무 놀라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토황소격문 외에 '황소의 난'에 대해 자세히 알려져있지 않지만 황소의 난은 사실 역사상 처음으로 부당한 간접세에 대한 조세저항이 내전으로 확대된 대규모 민중봉기다. 이전에도 각 고을 수령들의 수탈로 인한 민란은 빈번히 일어났지만 조직적으로 중앙정부의 조세정책에 반기를 들고 이것이 내전으로 확대된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당시 9세기 당나라 정부는 막대한 재정부채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를 한방에 해결한 방법이 바로 소금세였다. 원래 한 말에 10냥 정도하던 소금에 290냥의 세금을 붙여 300냥에 팔고 모든 소금 생산과 판매를 국가가 관리하는 전매제를 실시해 백성들에게 강매했다. 소금값이 갑자기 30배나 뛰면서 막대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지만 당나라 조정의 관료들은 사치를 멈추지 않았고 서민들은 세금 부담에 생존이 위협받게 됐다.
이에 소금밀매업자들이 크게 증가하고 암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당나라 정부가 내놓은 가격의 반값에 소금을 팔기 시작했고 곧바로 큰 유통망이 만들어졌다. 당나라 정부가 밀수를 단속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하자 소금밀매업자들은 물론 일반 백성들도 무기를 들고 무장하고 정부 단속반과 혈전을 치르기 시작했고 이것이 바로 반란으로 이어졌다.
그러자 당나라는 각 변방지역의 절도사들을 소환해 본격적인 토벌에 나섰고 특히 투르크계 출신 사타족의 용병대장이었던 이극용(李克用)의 활약으로 10년만에 황소의 난을 토벌하는데 성공한다. 이 전쟁에서 황소의 심복이었던 주온(朱溫)은 황소를 배신하고 당나라 조정에 투항, 전충(全忠)이란 이름을 하사받고 장수로 임명된다. 20여년 뒤 이 주전충은 당나라를 멸망시키는 주역이 된다.
이런 상황에도 당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소금세를 없애지 못한 이유는 소금세가 재정수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온갖 면세특권을 가진 귀족들의 조세저항이 워낙 심하다보니 직접세를 거둬들이기보다는 간접세로 세수 대부분을 충당했고 결국 조세저항의 한계선을 넘어서면서 반란을 자초한 셈이다.
사실 간접세 논란은 1000년 이상 지난 현재에도 계속 진행 중에 있다. 간접세는 직접세에 비해 거둬들이기 쉽고 부족한 세수를 빨리 확충하기도 좋기 때문에 역사 속 수많은 정부들이 써먹었던 꼼수 중 하나였다. 담뱃세, 주류세, 유류세 등 각종 기호품에 붙은 세금들이 대표적이다.
특히 담뱃세에 대한 논란은 끊이질 않고 있다. 국민보건을 해치는 물품의 가격을 높인다는 '죄악세(Sin Tax)'란 명분으로 담뱃세 세수는 올해 13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2014년 6조9905억원, 지난해 10조5181억원에 이어 계속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이는 지난해 재산세 세수 9조원보다 많은 규모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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