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개나리가 화창한 어느 날 내 오랜 친구가 죽었다. 병원에서 말하는 사인은 간암이었다. 그리고 3주 후, 세월호가 침몰했다. 선실에 갇혀 유리창을 두드리는 학생들 사진을 보면서 나는 깨달았다. 내 친구의 사인은 자살이라는 것을. 4월 16일 이후 얼마나 많은 날을 하늘과 땅이 붙어버렸으면 하면서 살았던가. 얼마나 많은 밤을 제발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제발 내일 눈을 뜨지 않기를 기도하며 잠이 들었던가. 가라앉는 세월호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은 안전에 대한 갈망, 구조하지 않는 공권력에 대한 원망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공포감이었다.
공포감은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불행해졌을 때 환기된다. 세월호에서 느끼는 공포감은 '그 상황이라면 나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하는 생각에서 발생한다. 나나 내 아이들이나 같은 상황에서 선실 안에서 가만히 다음 지시를 기다렸을 것이다. 선장이라는 권위가 지시하는 바를 거스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학생들은 배운 대로 착하게 선장의 지시를 그대로 따랐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로 죽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일부 학생들은 갑판으로 피신해 살아날 수 있었다.
세월호의 교훈은 결코 '안전'이 아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가르치지 못해서 미안한 것이다. 어른 말씀 잘 듣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부모님 말씀 잘 듣는 착한 학생, 권위에 충실히 따르는 것, 권위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 이것이 우리 교육의 모습 아니던가. 세월호에서 고작 '안전'이라는 교훈을 얻는데 그친다면 다음에 가라앉는 것은 대한민국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의심하듯이 지금 이미 대한민국은 심각하게 기울어져 있는 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안전'한 객실에 가만히 앉아있지 말고 서둘러 파도가 치는 '위험'한 갑판으로 피신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안전해 보이는 가정에서, 안전해 보이는 학교에서, 안전해 보이는 여러 사회 질서와 제도 속에서 우리는 구명조끼만 걸친 채 오지도 않을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만 있는 것은 아닐까? 안전한 체제 안에서 때를 기다리라는 방송은 지금도 학교에서 가정에서 미디어에서 되풀이되어 나오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순치된 우리의 무딘 감성을 찢어 발길 것을 세월호가 요구하고 있다.
마진찬 사회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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