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나 또한 내가 사는 동네를 좋아한다. 독립문 공원과 안산 숲을 산책할 수 있고, 가끔 이진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내 쪽으로 길 하나 건너면 영천시장이다. 허름한 밥집, 떡집, 반찬집, 잡화점에 사람 사는 풋풋함이 넘친다. 시장 입구에는 여남은 할머니ㆍ할아버지들이 채소를 한 웅큼 늘어놓고 손님을 기다리신다. 쪼글쪼글한 얼굴에 새겨진 한분 한분의 세월이 아득하다. "좌판 위의 채소는 아마 직접 따 오신 거겠지, 이걸 다 팔아봤자 꼬깃꼬깃 천원짜리 네댓장이나 될까, 여기 1만년 인류 시장경제의 원형이 남아 있구나, 이분들이 돌아가시면 다음 세대는 영영 이 풍경을 볼 수 없겠구나…." 혼자 엉뚱한 상상을 펼치며 숙연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단속반이 할아버지의 채소 보따리를 낚아채는 순간 그 남자도 그 보따리를 잡고 버텼다. 실랑이가 벌어졌고, 단속반은 "공무 집행 방해하는 거냐. 나를 밀치겠다는 거냐"며 눈을 부라렸다. 물리적 충돌을 유도해서 엮어 보겠다는 의도가 읽혔고, 주변 행인들이 뜯어말려서 상황이 종료됐다. 인간은 안중에도 없이 사이보그처럼 자기 직무만 추진하는 영혼 없는 공무원에 대한 혐오가 저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올랐다. 단속반은 그 남자에게 시간을 쏟으면 다른 사람들을 다 놓치겠다고 판단했는지 결국 자루에서 손을 뗐다. 할아버지는 보따리를 들고 횡단보도를 무사히 건넜고, 행인에 불과한 나는 그제서야 단속반에게 나도 한 마디 할 걸, 후회가 들었다. "남한테 폐 끼치는 것도 아닌데 굳이 단속할 필요가 있을까요. 아무리 신고가 들어왔다 해도 노인네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시면 어떡해요. 오늘 행태에 대해 구청장에게 항의하겠어요." 이렇게 말하면 어땠을까, 혼자 하릴없이 시뮬레이션을 거듭했다.
이날 거칠게 노인들을 윽박지른 단속반은 말단 공무원이거나 이들의 지시를 받는 용역일 것이다. 이들이 서대문구 명의로 일한다면 서대문구청장의 지휘를 받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서대문구청장 당선자가 이날 사태를 본다면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불법 상행위 단속은 불가피하며 아무리 노인이라도 예외가 없다"고 할까, 아니면, "나는 따뜻한 계도를 지시했지만 말단 요원들에게 뜻이 잘 전달되지 않았다"며 유감을 표할까.
이채훈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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