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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사람, 장소, 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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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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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서울에서 가장 핫하다는 종로 익선동 대폿집에 평소 엮기기(?) 어려운 네 명이 모였다. 선함을 보탠다는 의미를 품은 동네 익선동(益善洞). 왠지 선하고 션(시원)한 이야기가 솔솔 피어오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접혀진 공간인 골목길에 들어선 고깃집 구석에 그야말로 구겨져 앉아 두 시간 동안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막창구이 냄새와 함께 맛있게 구워냈다. 두 명은 서울시의 시설을 관리하는 공단의 관계자였고 다른 둘은 재미 한국인으로 한 명은 경기장을 디자인하는 건축가(이렇게 익명으로 소개해도 워낙 희귀한 직업이라 대번에 누군지 알 수 있는 분이다), 한 명은 미시건 대학에서 스포츠경영학을 가르치는 학자다. 미국에서도 한 동네 사는 두 이방인은 마침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경기장의 사후활용 방안에 대한 자문을 마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자연스레 올림픽 경기장에 대한 쓴 소리로 시작해 공간과 사람, 그리고 이 둘을 잇는 환대(歡待, hospitality)라는 주제로 이어졌다.

가장 할 말이 많았던 건축가는 오래된 스포츠 시설의 보수를 고민하고 있는 공무원에게 날선 질문을 던진다. 낡은 공간을 리모델링(remodeling)하기 전에 리디파이닝(re-defining)을 해야 한다는 일갈. 겉모양을 매끈하게 치장하는 것보다 공간을 존재 이유를 재규정하는 작업이 더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상암월드컵 경기장, 장충체육관, 고척스카이돔은 각각 축구장, 농구장, 야구장이라는 원래의 존재 이유에 갇혀 있는 한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 세계와는 끝내 단절될지도 모른다. 경기장이라는 거대한 공간의 빈틈에 찜질방과 편의점을 빽빽이 채워 놓는다고 임무를 상실한 공간들이 살아나지 않는다. 공간의 경제적인 효용성을 강조해온 기존의 정책 기조가 전격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여전히 평창의 빙상경기장 사후활용 방안으로 얼음 창고를 내놓은 헛발질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경기장이라는 거대한 건축물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곳에서 생명을 걸고 싸우는 곳으로, 다시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 지르는 발산의 장소로 변해왔다. 다가올 시대에 경기장 맡게 될 새로운 임무를 상상해 볼 때다.
공간 존재의미를 재규정하는 작업은 특정 공간에 어떤 이름을 붙이는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 학생들이 수업을 받는 곳을 교실(敎室)이라고 부르지 않고 학실(學室)이라고 부른다면 그 공간은 가르치는 곳이 아닌 배우는 곳이 된다. 교실을 학실이라고 부를 때 교육의 주인공은 교사가 아니라 학생이다. 공간에 이름을 붙이고 재규정을 하는 행위는 이렇듯 전복적이다.

이 글의 제목으로 가져온 ‘사람, 장소, 환대’는 2015년 인류학자 김현경이 쓴 책의 제목이다. 스포츠 건축물인 경기장이라는 장소와 이를 경험하는 사람 이야기를 하다 문득 소환됐다. 그는 ‘사람이 된다는 건 자리 혹은 장소를 갖는다는 의미’고 ‘환대는 자리를 (내어) 주는 행위’라고 단정한다(김현경, 2015, 26쪽).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행위는 상대를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런 일이 실제로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에서 일어났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올림픽에 앞서 반동성애법을 통과시키고 성소수자들에게 올림픽 기간 중 관례적으로 제공하던 프라이드 하우스라는 공간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성소수자 운동선수들이 안심하고 올림픽 기간 동안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지 않음으로써 소치올림픽은 환대는커녕 배제와 무시의 이벤트가 돼 버렸다. 그 프라이드 하우스라는 공간이 평창에 마련될지 아직 미지수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는 지난 1년여 동안 평창동계올림픽 기간 중 성소수자들을 위한 환대의 공간, 프라이드 하우스를 마련하려고 노력해 왔지만 아직 평창올림픽 조직위원회는 명확한 답을 피하고 있다. 평창이 환대의 장소가 될지 배제의 장소가 될지는 프라이드 하우스라는 장소의 존폐에 달려있다.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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