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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노란 국화 옆에 하얀 차꽃이 피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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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원철 스님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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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으로 한 번씩 오고가며 걷는 100m 남짓한 도심 골목길이 주는 편안함을 누리고 있다. 담장을 따라 길게 놓인 여러 개의 커다란 화분에는 가을 열무와 갓 그리고 배추를 심었다. 작고 오래된 나지막한 한옥에 사는 노부부의 바지런한 손길 따라 철철이 품종이 바뀌는 농작물 몇 포기를 지나가며 바라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계절마다 여러 가지 채소들이 꽃노릇을 대신하며 회색 길 위에 푸른 생명력을 만들었다.

골목길이 끝나면서 빙둘러 높은 빌딩이 담장을 대신하는 종로 조계사 마당이 나온다. 거기에서 화려한 가을꽃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이제 국화축제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늦가을 차가운 바람을 따라 그 향기는 더욱 짙어진다. 선인들은 가을바람을 금풍(金風)이라 불렀다. 푸른 것을 노랗게 물들이기 때문이다. 국화는 본래 노란색이지만 그 덕분에 금국(金菊)라는 이름이 더해졌다.

음력을 사용하던 시절 옛 시인은 ‘구월국화는 구월에 핀다(九月菊花九月開)’고 노래했다. 평범한 말이 오히려 더 긴 여운을 남기는 법이다. 양력으로 환산한 ‘시월국화는 시월에 핀다더라’는 국화축제를 알리는 홍보문구도 어느 새 지나가 버린 10월을 뒤로 하고 보니 다소 바랜 느낌이다. 11월에는 그 표어를 볼 때마다 ‘늦가을 국화는 늦가을에 핀다더라’라고 읽어야겠다.

살다보면 꽃을 줄 때도 있고 받을 일도 있다. 그리고 꽃을 뿌릴 일도 더러 생긴다. 또 대규모 축제행사장에서 눈처럼 쏟아지는 종이 꽃가루 세례를 받기도 한다. 그 옛날 우두법융(594~657) 선사는 새가 물어다주는 꽃을 받았다고 전한다. 당신은 바위 위에 단정히 앉아 명상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고요한 모습의 아름다움에 반한 새가 감동하여 꽃을 올린 것이다. 아마 가을이었다면 국화꽃을 물어다 주었을 것이다.

팔만대장경은 가장 아름다운 감동적인 순간을 하늘에서 꽃비가 내릴 때라고 묘사했다. 새가 물어다주는 한두 송이가 아니라 비가 오듯 쏟아지는 경우를 우화(雨花)라고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소나기가 지나가듯 잠깐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쉬워할 수만 없는 일이다.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영원한 것으로 만드는 방법을 궁리하다가 드디어 묘안을 찾았다. 건물 이름에 ‘우화’를 붙인 것이다. 우화루(雨花樓)! 꽃 세례를 받고 싶을 때 언제나 상상의 꽃비가 가득 내리는 그 누각의 처마 아래에 서성대기만 하면 될 일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 무렵 화려한 국화마당을 뒤로하고서 다시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어귀에 외따로 있는 화분에는 찔레꽃 같은 하얀 차꽃이 몇 송이 피었다. 아! 국화도 가을에 피지만 차꽃도 가을에 피는구나. 순간 10여일 전에 만났던 부산 범어사의 차나무들이 생각났다. 꽃과 열매가 어우러져 제대로 정원수 노릇을 하고 있다. 화실상봉(花實相逢)이라고 했던가? 꽃과 열매가 서로 한 가지에서 만난 것이다. 같이 있던 ‘알쓸신잡’형 도반이 한 마디 보탰다. 그 열매는 일년을 나무에서 보낸 묵은 열매라는 것이다. 그 덕분에 작년열매와 올해 꽃이 상봉한 것이다. 열매는 꽃을 만나기 위하여 일년을 기다린 셈이다. 기다림의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말없이 보여준다.

국화의 화려함도 좋지만 차꽃의 소박함도 또 다른 아름다움이다. 화분인지라 땅심이 부족한 탓에 열매 없이 겨우 꽃 몇 송이 달고 있을 뿐이지만 ‘나도 가을꽃’이라며 도심 한 구석에서 작게 빛난다.

원철 스님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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