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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4년도 평생, 하루도 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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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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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퇴근길, 시원한 물회 생각이 났다. 에너지가 고갈되는 때는 시원하고 매콤한 것이 당기는 법. 청계천을 지나 단골 물횟집에서 저녁을 먹고 광화문으로 돌아오는데 온통 붉은 악마들이다. 오호라, 오늘 월드컵 축구 우리나라 경기가 있구나. 붉은 악마처럼 머리에 뿔은 달지 못하고 산책만 하고 돌아왔지만, 매주 토요일이면 태극기와 성조기 심지어 이스라엘 국기까지 앞세운 이상한 단체들의 점거로 불쾌한 곳이 돼버린 광화문 광장에 모처럼 활기가 도는 상쾌한 여름밤이었다.

집에 돌아와 맥주 한 잔 앞에 놓고 TV를 켰다. 대한민국과 스웨덴 전. 날렵한 몸을 날려 여러 번 공을 막아낸 뛰어난 수문장 조현우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가대표가 경기에 졌다. 전반에 잘 버티어 냈으나 후반에 비디오판독(VAR)으로 페널티킥(PK)을 허용, 결론은 1:0, 90분 축제가 막을 내렸다. 수많은 집에서 닭뼈와 빈 맥줏잔과 실망이 남은 여름밤을 채웠으리라. 축구 좋아하는 내 제자의 아들은 "다신 축구 안 볼 것이고 축구 이야기도 안 하고 학교서 축구도 안 하고 심지어 족구도 안 하고(족구는 무슨 죄?)"라며, 태블릿서 축구게임도 지우고 퉁퉁 부은 눈으로 잠이 들었다고 한다.
아이는 울고 어른은 그 울음과 결심이 귀엽고 재밌어서 웃는다. 막상 경기를 뛴 선수들은 어떨까. 아마 오래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PK를 허용한 수비수나 공을 막지 못한 골키퍼는 자책감에 오래 괴로울 것이다. 하지만 한 번의 경기는 매일의 지난한 훈련처럼 지나가는 일. 패배한 선수들이 실수를 마음에 오래 담고 가지 않으면 좋겠다. 다음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성공은 성공해보지 못한 이에게만/가장 달콤하게 여겨지는 법/꿀맛을 제대로 알려면/가장 극심한 갈증을 겪어야 한다"고 했다. 갈증의 시간 없이 성공의 기쁨도 느끼지 못한다는 뜻. 지금은 해설을 하는 안정환 선수는 '4년이 평생'이라는 말을 했다. 월드컵에서 뛰는 그 한 번의 기회를 잡기 위한 지난한 기다림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 기다림의 시간이 바로 극심한 갈증의 시간이며 그 인내가 다음의 성공에 큰 의미를 준다.

월드컵이 4년에 한 번이라 얼마나 다행인가. 우리는 매일 하루를 산다. 4년 만의 월드컵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선수든,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이든, 우리는 매일 어떤 것을 향해 간다. 그 지향은 높고 대단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깊고 평평한 길이다. 한 골을 위해 수천 수만 번의 훈련이 있듯,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길을 걷는 순례자로서 걸어가는 그 하루가 중요하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일"이라고 속리산의 평평한 길을 통해 들려준 이는 나희덕 시인이었다.
그러므로 선수들이나 우리들 모두 감사하게 주어지는 하루라는 평생을 살면 된다. 매일의 아침을 한 생처럼 맞으면 된다. 우리는 우리의 하루를 살고, 선수들 또한 남은 두 경기에서 훈련을 하는 어느 하루처럼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걸로 충분하다.

축제는 짧아서 좋다. 축제가 끝난 빈 광장을 생각한다. 다시 차가 오가고 출근하는 시민들이 서 있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또 다른 축제를 위한 노력들로 채워진다. 작은 실수로 울고 작은 성취로 웃는다. 간밤에 울다 잠든 아이는 다시 축구공을 들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갈 것이다. 4년도 평생, 하루도 평생. 무언가를 향한 기다림과 성실한 땀으로 채울 수 있는 이 하루가 고맙다.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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