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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층계참/김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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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계참에 서 있는 사람을 보았다 층계참에 오래도록 머물 수 있는 사람은 슬픔을 곱씹는다 비밀의 끈을 풀어내거나 분노한다 층의 국경은 너무 가까워서 전서구를 날릴 수 없다 층계참에 사는 사람을 보려면 층계참에 가야 한다 그곳에 사람이 가득 차면 슬픈 일이 일어난다 계단의 중간은 비어 있고 덫을 놓고 사람을 기다린다 누군가 먼저 와 있다면 자신만의 층계참을 찾아가야 한다 멈춰 서서 여기에 없는 사람과 여기에 없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영원히 잠시간 머물 수 있는 층계참 적당한 더위와 추위가 있는 도래지 아무도 비를 맞을 수 없지만 어쩐지 모두 젖어 있다 펜도 없이 편지를 쓰고 공기 속에 놓고 간다 투명해질 때까지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는 곳을 찾는다면 층계참이 좋다 반쪽이 된 사람들이 나머지를 잊고 서 있다 출구가 너무 많고 공공연히 비밀을 말할 수 있다 층계참에 오래 서 있으면 모르는 사람들을 배웅할 수 있다 지나치게 배부르거나 지나치게 배고픈 자들이 오르고 내린다 지나친다 아무도 숨지 않는 층계참에는 귀신도 머물지 않는다

[오후 한 詩]층계참/김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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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계참에 모여 앉아 딱지를 접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햇살을 오후 내내 동무들과 접고 또 접었다. 언제 출근했는지 언제 퇴근할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엄마들이 일하는 공장은 산동네 층계들이 끝나고도 한참 더 먼 곳에 있었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진실로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장차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또한 얼마나 참혹하고 비루할 것인지에 대해 감히 알려고 하지 않았듯이. 대신 가끔 층계참에 앉아 <잠언>을 소리 내어 읽었다. 그럴 때면 왠지 모르게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계단마다 피고는 했던 사루비아와 붓꽃은 실은 <선데이 서울>보다 후졌었다. 층계참은 아무리 가꾸어도 그렇게 가난했다. 그것은 그러니까 거의 운명에 가까웠다. 참고로 '층계참'은 '층계의 중간에 있는 좀 넓은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층계'를 거꾸로 하면 '계층'이 된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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