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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 꽃잎/복효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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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물이 뜨거워지자
입을 쩍 벌린 바지락 속살에
새끼손톱만 한 어린 게가 묻혀 있다

제 집으로 알고 기어든 어린 게의 행방을 고자질하지 않으려
바지락은 마지막까지 입을 꼭 다물었겠지
뜨거운 국물이 제 입을 열어젖히려 하자
속살 더 깊이 어린 게를 품었을 거야
비릿한 양수 냄새 속으로 유영해 들어가려는
어린 게를 다독이며
꼭 다문 복화술로 자장가라도 불렀을라나
이쯤이면 좋겠어 한소끔 꿈이라도 꿀래
어린 게의 잠투정이 잦아들자
지난밤 바다의 사연을 읽어 보라는 듯
바지락은 책 표지를 활짝 펼쳐 보인다
책갈피에 끼워 놓은 꽃잎같이
앞발 하나 다치지 않은 어린 게의 홍조
바지락이 흘렸을 눈물 같은 것으로
한 대접 바다가 짜다

■술 마시고 난 다음 날 속 달랠 음식으로 콩나물국밥도 좋고 대구탕도 좋지만 바지락칼국수도 꽤 근사하다. 굵은 면발을 호로록 입안에 가득 넣고 호호 불어 가며 국물을 마시고 나면 간밤에 낮 붉히던 일들도 괜히 심통 나던 말들도 어느새 스르르 풀어지고 다시 살맛이 나곤 한다. 그래, 음식이 귀한 까닭은 여럿이겠지만, 살아갈 맛을 보태 준다는 것도 분명 그중 하나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지락칼국수는 면을 먹고 국물을 마시고 그래서 어느 정도 배가 차고 나면 수북이 쌓인 바지락들을 하나하나 까서 먹는 재미도 쏠쏠한 음식이다. 그런데 바지락들을 뒤적이다 보면 아주 가끔 새끼손톱 반절보다 더 작은 어린 게를 만날 때가 있다. 너무 작아 처음엔 이게 뭐지 그러면서 유심히 보아야 겨우 그 정체를 알아차릴 만큼 작은 게 말이다. 세상에나 이렇게 작은 게가 있다니, 그것도 놀랄 일이긴 하지만, 또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어린 게는 "앞발 하나 다치지 않"은 채다! 물론 바지락이 "마지막까지 입을 꼭 다물"고 제 품 안에 껴안은 소이다. 갸륵하지 않은가. 아름답지 않은가. 그 자그마한 게가 바지락 속에서 연하디연한 주황색 꽃으로 새삼 맺힌 사연은 "바지락이 흘렸을 눈물"에 있을 터. 우리는 그 눈물을 한 대접씩 들이키면서 자꾸 뜨거워지는 것이고.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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