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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50]야구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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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야구장에 왔습니다. 장맛비 속에 우산을 쓰고 왔습니다. 고교야구선수권대회첫날 마지막 경기입니다. 개막전부터 구미가 당겼지만, 굳이 이 게임을 골랐습니다. 동산고와 공주고의 시합입니다. 첫판부터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난, 이 두 학교의 대결이 더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동산’은 이 대회의 전설입니다. 1950년대에 내리 3연패를 해서 우승기를 영구보관하고 있는 학교입니다.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 화백이 그렸다는 ‘푸른 용’ 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깃발이지요. ‘공주’ 역시 이 대회 우승 경력을 비롯해서 빛나는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입니다.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문답 하나로 충분합니다. “누가 나온 학교인가?” ‘류현진’과 ‘박찬호’. ‘메이저 리거’를 낳고 키운 학교지요. 오늘 경기는 현진학교와 찬호학교의 싸움입니다. 눈에 띄는 선수가 많을 것입니다. 투수만 보려는 것은 물론 아니지요. 한국야구를 넘어 ‘빅 리그’의 미래를 움직일 꿈나무들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당연히 설렘과 기대를 안고 왔습니다. 저 같은 생각으로 모인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외야는 몰라도 내야는 제법 시끌벅적하리라 예상했습니다. 수천까지는 아니어도, 수백의 시선이 ‘일구(一球) 일구’에 환호하리라 짐작했습니다. 순정어린 박수갈채가 쏟아지는 정경을 떠올렸습니다.

한해, 800만 관중을 헤아리는 야구리그가 있는 나라니까요. 그런 나라의 대표적인 고교야구대회니까요. 올해 대회가 70년 역사상 제일 큰 규모라니까요. 주최 신문사가, 참가고교 동문들의 성원을 촉구하는 사고(社告)도 여러 번 냈으니까요. ‘고교야구가 살아야 한국야구가 산’다는 목소리도 어제 오늘의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제가 그린 장면들은 프로야구 중계 화면의 잔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삼사십년 전 동대문야구장의 기억이었던 모양입니다. 운동장과 함께 사라진 추억의 풍경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이웃나라 야구제전에서 부럽게 바라보았던 모습을 여기서도 보고 싶었던 게지요.

수만 명의 관중이 구름처럼 모여드는 고교야구대회. 본선에 오르기만 해도, 평생 영광으로 여기는 대회. 모든 경기가 전국에 중계되고, 게임마다 뉴스와 화제가 만발하는 대회. 모델이 야구공 하나를 들고, 운동장 한가운데 서 있는 것만으로도 CF 한편이 되는 대회. ‘고시엔(甲子園)’대회.

그러나, 오늘 여기 모인 관중 숫자는 셀 수 있을 정도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누군지도 알겠습니다. 선수들 어머니 아버지입니다. 지금,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는 남자는 ‘동산’ 투수의 아버지입니다. 방금 안타를 치고 나간 선수를 향해, 일어나 춤추는 여인은 ‘공주’의 간판타자 어머니입니다.

갑자기, 선수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저는 불청객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선수들 이름을 잘 모르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옆 사람이 누군지, 뒷사람이 누군지 저만 모릅니다. 숙소 위치도 모르고, 선생님 이름도 모릅니다. 모두가 저에 대해 궁금해 할 것 같습니다. “저 사람은 누구지? 이 빗속에. 그것도 혼자서.”

저는 동대문야구장 시절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 때 이후로 고교야구 관람은 처음입니다. 고교야구는 아직도, 동창회와 향우회 현수막 아래 북과 꽹과리 소리가 시끄러울 줄 알았습니다. 교복차림의 후배들과 나이를 잊은 졸업생들이, 함께 교가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는 그라운드로 알았습니다.

아뿔싸! 질금거리던 비가 폭우로 돌변합니다. 심판이 경기를 중단시킵니다. 쉽게 잦아들 비가 아닙니다. 숫제 퍼붓는 수준인데다 강풍까지 합세해서, 운동장 전체가 삽시에 물바다가 됩니다. 결국, 2회를 넘기지 못하고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됩니다. 내일 아침 아홉시에 속개(續開)된다고 합니다.

혼자 돌아 나오려니 쓸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내 씁쓸해졌습니다. 주제넘게 한국 야구의 미래까지 걱정했습니다. 전문가들 앞이었다면, 물정모르는 발상에 낭만적 몽상이라고 면박이나 받을 까탈들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이 대회를 돔 구장에서 열 수는 없나.’ ‘일본 H구단은 고교야구를 위해 고시엔구장을 흔쾌히 내준다는데.’

홈구장을 고등학생들에게 내어주기 위해 H구단은, 열흘간 원정 스케줄을 짜거나 인근의 다른 구장을 이용한다지요. 세상 모든 일의 값어치는 그것과 관련된 이들의 마음씀씀이에 따라 매겨집니다. 그러한 배려와 대접이 주인공들의 행동을 변화시킵니다. 미래를 달라지게 합니다.

제 원망의 대상은 그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스탠드는 텅텅 비워놓고서, 류현진 박찬호만 끊임없이 나오길 기다리다니! 도둑 심보 아닌가. 시집이나 소설책 한 권 읽지 않으면서, 노벨문학상 작가를 기다리는 것과 뭐가 다르지? 뿌린 만큼 거두는 것 아닌가? ”

그래도, 최근에 들은 소식 하나로 궂은 심사를 달래봅니다. 화성 매향리 미군 사격장 자리에, 대규모 리틀야구장이 세워졌다지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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