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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48] 병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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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백(李白)이 그의 시 '장진주(將進酒)'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덩그런 집 속/거울과 마주앉아 백발을 슬퍼함을!/아침에 푸른 실 같던 머리,/저녁엔 눈이 하얗게 내렸어라'. 군불견(君不見)… 조여청사모성설(朝如靑絲暮成雪). 이 대목에서 독자는 두 부류로 나뉩니다.

 '무슨 헛소리인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과 '옳거니! 과연 이태백이다!' 하면서 무릎을 치는 사람. 앞쪽에 가깝다면 청년입니다. 후자라면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선 나이겠지요. 장강(長江)의 물결이 한 번 바다로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깨달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결론은 간단합니다. '마시자!' 콜롬비아 대학 출판부가 영어로 옮긴 이 시의 제목은 더 적나라합니다. "Bring the Wine!" 거나하게 취한 사나이의 얼굴이 보입니다. 그가 외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술 가져와!" 누구겠습니까. 한 번에 삼백 잔은 마셔야 한다고 쓴 사람, 이백입니다.

 인생의 '덧없음'과 허락된 시간의 소중함을 생각합니다. 뜬금없이 어떤 상호(商號)를 떠올립니다. 멋대로 지어봅니다. '장안주점(長安酒店)' 혹은 '황하반점(黃河飯店)'. 술집이나 밥집이 아니라, 호텔입니다. 중국은 호텔을 그렇게들 부르지요. 거기에 가까운 이들을 불러놓고, 여러 날 함께 먹고 자면서 향연을 펼치고 싶습니다.

 호화롭지도 사치스럽지도 않은 곳입니다. 로비도 연회장도 정갈하고 소박합니다. 아무 것도 꾸미지 않았는데 아름답고 그윽합니다. 홀 가운데엔 커다란 술통이 하나 놓여있습니다. 이태백 같은 주당들 열두어 명이, 밤새 마셔도 바닥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크기입니다.
 만병통치의 '술 샘(酒泉)'입니다. 몸에 좋은 것은 맛이 없게 마련이지만, 이 술은 예외입니다. 마실 때마다 새로운 맛이, 자꾸 새 잔을 채우게 합니다. 과음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 잔이나 삼백 잔이나 취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춤추고 노래하면서 술을 마십니다. 인생의 행복을 몸으로 느끼면서 잔을 비웁니다.

 미래의 병원은 호텔과 다름없을 것이라지요. 아픈 사람들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들이 모여서 더 복된 삶을 설계하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지금 이곳을 생각하면,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여기는 병원입니다. 제가 아픈 것은 아닌데, 요즘 저는 병원 출입이 잦습니다. 아픈 식구가 둘입니다.

 이웃에 사는 선배의 이야기가 자꾸 생각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인체에도 '내구연한(耐久年限)'이 있다. 60년쯤 된다. 우리 몸은 그 정도 세월에 견디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 이상 쓰려면 겸허한 마음으로, 살살 달래가며 써야 한다. 보증기간을 훨씬 넘긴 물건에서 어찌 신제품의 성능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제 가족들이 병원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수리(修理)'가 빈번해질 수밖에 없는 육신들이니까요. 특히, 여든 세 해나 쓴 몸은 이제 더 이상 고쳐 쓰기도 힘들답니다. 의사의 이야기를 나름대로 해석해보니 이런 뜻으로 읽혔습니다. "이제 그만 쓰시지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날더러 '그만 쓰라'고? 그렇다. 세상에 어떤 물건이 저절로 못쓰게 되랴. 쓴 사람 잘못이다. '가족'이란 물건의 사용자는 다른 가족들 모두 아닌가. 어느 식구의 몸이 제 홀로 망가지랴. 모두의 책임이다. 막 쓰고 함부로 취급한 탓이다. 험하게 다루고 무심하게 버려둔 결과다."

 우리는 누군가를 환자로 만듭니다. 가족과 친척, 친구와 이웃을 아프게 합니다. 귀찮게 하고, 애간장을 녹이고, 끼니를 거르게 하고, 고약한 숙제를 안기고, 시험에 들게 하고, 약점을 흔들고, 급소를 건드리고…. 그리하여, 한 사람과 관계있는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을 병들게 합니다.

 병상을 지키는 보호자들과 면회객의 절반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면식범(面識犯)'. 아침에 '푸른 실'처럼 빛나던 머리를, 저녁에 '백발'이 되게 한 용의자들입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릴 수밖에요. 병원에 들어서면, 경찰에 연행된 범죄자처럼 오금이 저립니다. 의사와 간호사가 형사로 보이고, 각종 서식들이 취조문서처럼 보입니다.

 미래의 병원에 가보고 싶습니다. 호텔을 닮은 병원 말입니다. 세상 모든 병원이 간판을 내리고, 일제히 호텔로 바뀌는 날을 기다려봅니다. 너무 아파서, 도망치듯이 하늘로 간 동화작가 정채봉 형이 꿈꾸던 세상입니다. 그의 시 '노란 손수건'에 담긴 마음 풍경입니다.

 "병실마다 밝혀있는 불빛을 본다/환자들이 완쾌되어 다 나가면/저 병실의 불들은 꺼야 하겠지//감옥에 죄수들이 없게 되면/하얀 손수건을 건다던가/병실에 환자들이 없게 되면/하늘색의 파란 손수건을 걸까//아니,/ 내 가슴속 미움과 번뇌가/다 나가서 텅 비게 되면/노란 손수건을 올릴까 보다"

 '그랜드부다페스트 호텔'을 닮은 병원, '장안주점'이나 '황하반점'에도 노란 깃발이 나부낄 것만 같습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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