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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43]새나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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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영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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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계절의 여왕'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장미도 찔레꽃도 아카시아도 구겨진 얼굴을 좀체 펴지 못합니다. 황사에 미세먼지, 나아질 줄 모르는 대기환경. '오월'이란 단어를 충신처럼 따르던 수식어들도 저만큼 멀어졌습니다. 푸르른, 화사한, 상큼한, 싱그러운… 그런 말들이 무색해졌습니다.

실망스럽기로 말하면, 어린이들과 '오월의 신부'들이겠지요. 오월을 전부 어린이날처럼 누려야 할 아이들이 실컷 뛰고 달리지 못하는 아쉬움. 파란 하늘과 새하얀 드레스의 시간을 눈부신 기억으로 간직할 수 없는 안타까움. 마스크를 하고 공놀이를 할 수야 없지요. 뿌옇게 흐린 날의 신부가 되고 싶은 처녀는 없지요.
아무래도 어린이들이 걱정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체육활동과 운동장의 시간이 부족한 그들에게 햇빛 구경이 점점 더 힘들어질 것 같아서입니다. 나빠지는 공기가, 나라에 대한 애정의 농도까지 떨어뜨리지는 않을까 염려스럽기도 합니다. 문제는 분명한데, 신통한 답이 없습니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어린이날 노래는 나가 놀길 권하는데 일기예보는 야외활동을 만류합니다. 엄마아빠는 당신들 어린 시절, 풀과 별과 함께 하던 시간을 자랑하지만 아이들에겐 옛이야기입니다. 흙장난을 하고 모래성을 쌓아야 할 아이들이 흙먼지와 모래바람에 갇혔습니다.

이런 참에 새 대통령이 어느 초등학교엘 갔다지요.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눈 모양입니다. 자연스럽게 미세먼지 이야기가 나오고, 아이들은 크게 두 가지 희망을 말했다고 들었습니다. "교실 바깥에 나가서 수업을 하고 싶어요." "미세먼지를 알려주는 단위가 어려워요. 쉽게 표현해주세요."
반갑기 그지없는 주문입니다. 그것은 어린이의 소망을 넘어, 온 국민의 긴급하고 간절한 바람이니까요. 마치 어떤 어른이 어린아이에게 시킨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어른들은 가끔씩 아이들에게 그런 일을 시킵니다. 스스로 꺼내기 어려운 말을 아이의 입을 빌어서 누군가에 전하곤 하지요.

아무튼, 중요한 문제의 핵심이 초등학교 교실에서 정리되었다는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닙니다. 땅위의 백성들, 길 위의 사람들에겐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 이야기만도 아닙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들 인생의 반은 길에서 보내는 것 아니던가요.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숨을 멈추지 않는 한, 원치 않는 것들이 끊임없이 우리들 몸속으로 들어온다는 것. 걱정도 아니던 일들이 심각한 걱정꺼리가 되어 우리를 위협한다는 것. 물, 공기, 바람… 그 무심하고 자애롭던 존재들이 국민 건강을 흔듭니다. 산업과 경제, 시장의 판세까지 좌우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기후마케팅'이란 전문용어조차 군대 말처럼 들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보는 중구난방(衆口難防). 동일 장소의 미세먼지를 A신문은 '보통'이라 하고, B방송은 '나쁨'이라 말합니다. C채널은 '외출을 자제하라' 하고 D구청은 말끝을 흐립니다. 전황(戰況)보도처럼 일사불란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어린이의 질문이, 대통령으로 하여금 그런 대책을 서두르게 했다지요. 아무려나, '대통령이 보이는 초등학교 교실 풍경'은 '새나라'에 대한 기대를 자연스럽게 부풀립니다. 어린 국민의 발언도 귀담아듣는 나라를 꿈꾸게 합니다. 스승의 날이 어째서 세종대왕께서 나신 날인지를 새삼 짚어보게 합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가 일컫듯, 위정자는 스승의 마음을 지닌 자여야 함을 일깨웁니다. 좋은 선생님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몇 번이나 일러주었는데 아직도 모르냐?"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내 설명이 어려웠던 모양이구나. 더 쉽게 말해주마… 그래도 모르겠으면 언제든 다시 물어보렴."

격쟁(擊錚)이란 것이 있었지요. 억울한 백성으로 하여금 왕의 행차에 뛰어들어 징을 치게 하던 제도입니다. 어가(御駕)를 멈추고 자별하게 민원을 챙겨듣던 정조임금이 떠오릅니다. 그것은 스승의 마음이지요. 그런 마음이라야, '각설(却說)하고 단도직입(單刀直入)'해야 하는 일들의 목록을 챙깁니다.

덕분에, 삼년간 미루기만 하던 문제도 결론이 났다지요. '세월호'에서 제자들을 살리려 분투하다가 끝내 목숨을 잃은 '기간제' 교사들의 '순직' 인정. 스승의 날이어서 더욱 빛났습니다. '만인'의 생각이 같다면, 그대로 '법'이지요. 선생님이란 이름 앞엔 어떤 계급도, 군더더기도 붙여서는 안 됩니다.

생각하건대, 선생님들은 이런 질문을 달고 사는 분들입니다.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교사로서, 아동문학가로서, 양심의 파수꾼으로서 평생을 뜨겁게 살다 간 분의 글 제목이지요. 이오덕(李五德) 선생의 절규에 가까운 탄식이었습니다. 동심과 도덕과 양심의 실종에 관한 외침이었습니다.

그 물음, 그 마음을 대통령이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나라, …이 산하(山河)를 어찌할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스승의 그것입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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