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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당구공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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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조용준 여행전문기자]난 당구공입니다. 족보를 따지자면 구기(球技)종목쯤 될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공 좀 가지고 노는 집안이란 뜻입니다. 우리 집안 큰 형님은 축구공입니다. 형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한 번 뛰는 날이면 나라가 떠들썩해지니까요. 2002년 한ㆍ일 월드컵은 가문 최고의 날이었습니다. 그동안 국민들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보답 할 줄 몰랐던 형님도 그때만은 아낌없이 돌려드렸습니다. 지금은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낄 만큼 몰락해 명맥만 유지할 정도로 홀대를 받는 중입니다. 단골로 여겨졌던 월드컵도 못갈 만큼 위태위태하니 말입니다. 집안 막내인 골프공도 맥을 못 추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살벌한(?) 청탁금지법 때문에 모두가 몸을 사리니 막내도 실업자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여기에 비하면 난 행운아입니다. 중년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전성기를 다시 누리며 주가상승 중입니다. 막내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비싼 골프보다는 싼 당구가 더 경제적이고 좋다나 뭐라나. 이런 대접을 받아야할 신분은 아니지만 부인하기도 어렵습니다. 사실 나의 인기는 100년을 훌쩍 넘어갑니다. 구한말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임금님은 나를 아주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노는 곳(당구대)은 귀한 옥돌로 만들어 관리 했습니다. 황제는 격무에 지친피로를 나와 지내며 싹 풀어내셨죠.
이후에도 놀이문화가 부족했던 국민들에게 난 특별한 즐거움이었습니다. 가장 전성기는 1980~90년대입니다. 젊은이들은 학사주점에서 막걸리에 전, 아니면 쏘텐(당시 파격적인 소주와 써니텐을 한 주전자에 섞은 칵테일)을 먹는 게 낙이었습니다. 형편이 좀 넉넉하면 생맥주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놀이문화의 백미는 바로 나였습니다. 우리집(당구장)은 젊은이들의 해방구였습니다. 흰 공과 빨간 공이 직선과 곡선을 넘나들며 화려한 춤사위를 보일 때마다 탄성과 환호가 터져 나왔죠. 상대편 탄식은 다른 이의 환호가 되기도 했습니다. 밤마다 천장을 돌아다니는 나의 현란한 움직임에 잠을 설치는 날도 많았습니다.

먹는 즐거움도 빠질 순 없습니다. 누구 할 것 없이 나를 보면 자장면이 생각났나봅니다. 하지만 자장면은 나와 친해지는데 불편한 존재입니다. 음식을 먹느라 나에게 집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장면은 주로 한 사람이 치고 난 후 먹는데 몇 젓가락 먹다보면 어느새 차례가 돌아옵니다. 그 짧은 시간에 후루룩 먹다가 순서가 되면 자장면을 오물거리며 나를 사정없이 때려냅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어떡하겠습니까. 나를 찾는 사람들이 저렇게 좋아하니 참을 수밖에요.

말 못할 고민도 많았습니다. 수없이 뿜어대는 담배연기는 미치도록 싫었습니다. 우리집은 너구리 소굴이나 다름없습니다. 어찌나 숨이 막히던지 당구대를 박차고 나가 떨어 질 때도 여러 번입니다. 내기로 잦은 다툼이 일어나 난장판이 되기도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형사들이 강력사건만 터지면 당구장부터 뒤지고 다녔을까요.
다시 전성기를 누리면서 눈꼴 시린 경험도 늘었지만 조금만 참으면 될 듯합니다. 지난해 말 국회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일은 안하고 싸움질만 하던 의원들이 우리집을 금연구역으로 지정한다며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올 연말이면 우리집에서 담배는 절대금지가 되는거죠. 기분이 좋긴 한데 금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외면할까 살짝 두려운 마음도 들긴 합니다. 그래도 미세먼지와 황사에 찌든 사람들이 쾌적한 공간에서 나와 지내는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천장을 오가는 화려한 기교에 꼴딱 밤을 새우더라도…. 모쪼록 황제가 즐긴 즐거움을 많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길 기대해도 되겠죠.

조용준 사진부장ㆍ여행전문기자 jun2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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