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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굴과 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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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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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가리는 음식이 없었는데 유독 굴 하나만은 먹기를 꺼렸다. 처음에는 어린 입맛에 비릿한 맛과 물컹거리는 식감을 썩 내켜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못 먹는 것은 아니었지만 굴이 식탁에 올랐을 때 몇 번 손사래를 치니 가족들 사이에서도 "얘는 굴은 안 먹는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그러고 보니 도시에서 자란 아이답게, 못 먹는 음식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유년 시절 곧잘 "난 굴은 안 먹어"라고 얘기하고 다녔고 굴이 유일한 편식 목록에 올랐다. 그러면서 콩나물을 안 먹는 친구, 계란을 안 먹는 친구 등과 어울렸으니 어째 그 시절엔 애들이 다 그 모양이었지 모르겠다.

성인이 된 뒤에는 굴을 먹는다. 하지만 20여년을 멀리 했더니 즐겨 찾지는 않게 됐다. 생굴이 들어간 김장 김치, 잘 삶은 돼지고기 곁들인 굴보쌈, 시원한 국물이 일품인 굴짬뽕 등 모두 좋아하지만 굴전이나 굴무침, 굴튀김 등 굴이 주재료인 음식을 찾아서 먹지는 않았다. 단숨에 일을 처리해 마치는 모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남양 원님 굴회 마시듯 한다'는 속담이 있는데 아직 남양 원님처럼 먹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그러다 최근 남양 원님이었으면 반색할 상황과 맞닥뜨렸다. 상당한 양의 굴을 얻어 먹게 된 것이다. 제철 맞은 씨알 굵은 굴이 큰 봉지에 담겨 있었는데 물을 뺀 실제 양이 2~3㎏은 족히 돼 보였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을 보낸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인근에 논정마을이라는 곳이 있는데 예로부터 굴로 유명했다고 한다. 게서 서울까지 올라온 굴의 노고를 봐서라도 얼리기 전에 싱싱한 맛을 충분히 만끽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비록 즐기지 는 않지만 굴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고의 안주로 대접 받고 있으니 핑계 삼아 집에서 굴 요리에 한 잔씩 마셔야겠다는 속내도 있었다.

그렇게 작정을 하고 며칠 동안 굴을 먹었다. 생굴을 초장에 찍거나 레몬 즙을 뿌려서 먹었고, 요즘 귀하다는 계란을 입혀 노릇하게 굴전을 부쳐 막걸리도 한 잔 마셨다. 무를 썰어 넣고 굴국을 끓였고 시원한 맛을 낼 거 같아 어묵탕에도 잔뜩 넣어봤다. 대파만 썰어 넣고 올리브유에 살짝 볶기도 했고 스파게티 면을 함께 버무려 굴 파스타도 만들었다. 싱싱한 생굴에서는 단맛이 돌았고 겨울 무와 함께 우러난 굴 국물에서는 간하지 않아도 감칠맛이 느껴졌다. 한껏 움츠린 익힌 굴도 진한 바다 내음을 품고 있었다. 굴을 돌에 핀 꽃이라는 의미로 '석화'라고 부르는 게 비로소 이해가 될 정도였다.

그렇게 먹다 보니 살면서 짧은 기간에 이렇게 굴을 많이 먹은 것은 처음이지 싶었다. 매일 굴 50개를 먹었다는 카사노바에게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왠지 기운이 나는 것도 같았다. 18세기 실존 인물인 지아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는 직접 쓴 책 '나의 편력'에 수많은 여인들과의 연애담과 함께 자신의 굴 사랑을 생생하게 고백한 바 있다. 어린 시절 편식을 하지 않았다면 카사노바처럼 어디서 얘기할 만한 편력을 갖게 됐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편견으로 멀리했던 것을 일부러라도 가까이 하니 그 매력을 새삼 느끼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비단 굴뿐만은 아닐 것이다.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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