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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어설픈 추측 대신 터놓고 얘기하세요

최종수정 2018.05.29 11:50 기사입력 2018.05.29 11:50

[여성칼럼] 어설픈 추측 대신 터놓고 얘기하세요

풋풋했던 대학교 1학년 때 저는 학교 캠퍼스에서 초록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던 이상형을 발견했습니다. 무슨 용기였는지 저는 학교 게시판에 "초록머리를 찾습니다"라는 글을 올렸고 몇 시간 후 그 아이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시죠? 제가 뭘 잘못했나요?"라는 질문에 저는 당당하게 "그쪽이 마음에 들어서요"라고 답했지요. 세 번 정도 만난 후 저는 '사귀자'라는 짧은 문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미안해'라는 답장이 왔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죠. 그 후로 캠퍼스에서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습니다.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못나 보였습니다. 그리고 거울을 보면서 못생긴 저 자신을 자책했지요.

"김수영 정신 차려! 시골에서 올라온 촌년 같은 너를 저런 애가 좋아하겠니? 에휴, 못난이 같으니라고…."
시골 상고 출신의 저와는 달리 외고, 과학고 출신이나 외국에서 살다 온 세련된 친구들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갖고 있던 열등감이 터져나왔던 것 같아요.

그리고 10년이 흘렀습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발달하면서 우연히 그 초록 머리 친구와 연락이 닿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까만 머리를 한 대기업 직원이 됐더군요. 용기를 내 그에게 물어봤습니다. 왜 나를 거절했느냐고. 그의 답변은 예상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사실 나도 니가 마음에 들었어. 그런데 그 전에도 너처럼 그렇게 적극적으로 다가와서 사귀었던 여자친구가 갑자기 마음이 변해서 잠수를 탄 후에 너무 고통스러웠거든. 네가 적극적으로 다가오니까 그때의 트라우마가 떠올라서 무섭고 두려웠어. 또 이렇게 마음을 줬다가 갑자기 사라지면 어떡하나 싶어서…. 너뿐만 아니라 지난 10년간 많은 여자가 다가왔지만 그럴 때마다 무서워서 도망갔어. 다들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나 참 바보 같지?"

그제야 마음속에 있던 오래된 열등감 하나가 풀리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지요. 똑같은 상황을 겪고도 사람은 모두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를 해석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식으로 각자의 스토리를 쌓아간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사실'을 보기보다는 자의적인 '추측'을 합니다. 마치 제가 '내가 못생겨서 저 아이가 나를 찬 거야'라고 추측했던 것처럼 '내가 여자라서 승진 대상에서 누락한 걸 거야' '내가 이혼 가정 자식이라고 나를 무시하는 건가' '내가 자기보다 못한 대학을 나왔다고 이런 일을 시키는 건가' 등등 상대방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열등감을 바탕으로 머릿속에서 소설을 씁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소설은 계속 왜곡되고 자신이 쓴 소설로 생겨난 상처는 더욱 깊어지지요.

일상적인 대화에서 자신의 '추측'으로 상처가 되는 경우는 대부분 이미 내가 갖고 있는 상처가 덧나는 경우지요. "아빠는 무슨 일 하셔?"라는 일상적인 질문이 아빠 없는 아이에겐 비수가 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여성은 어린 시절 '니가 예뻐서 그렇지'라는 말과 함께 수십 번의 성추행을 당한 후 '예쁘다'라는 말만 들어도 기겁을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남성은 '니가 예뻐서'라는 말로 그녀에게 다가와 사귀자고 하니 그녀는 매번 도망갔지요.

상대방이 무심코 하는 말이든 의도적으로 하는 말이든 그것이 상처가 된다면,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거나 혼자서 끙끙대며 머릿속으로 소설 쓰기를 중단하고 솔직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신이 했던 그 말이 내게 상처가 된다고, 당신은 의도치 않았겠지만 이 행위는 내게 폭력적이었다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눠보세요. 그럼 열에 아홉은 상대방도 놀라면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를 구할 것입니다. 설령 그것이 몇십 년 전 일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상처가 아직도 나를 괴롭힌다면 지금이라도 이야기를 해서 사과를 받아내세요.

그러고 나서 자기 스스로의 마음속 열등감과 트라우마를 들여다보세요. 어쩌면 당신을 무시하고 괴롭힌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당신 마음속의 열등감과 트라우마였을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그 해묵은 감정들을 내려놓으세요. 그리고 스스로 만들어낸 암울한 소설로부터 나 자신을 풀어주세요.

김수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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