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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91]문조당에서

최종수정 2018.05.11 09:26 기사입력 2018.05.11 09:26

윤제림 시인
윤제림 시인

한 사람 빠지고, 모두 모였습니다. 계절에 한 번씩은 꼭 얼굴을 보는 벗들의 모임입니다. 40년 '지기'들인데, 주로 여기서 만납니다. '문조당'. 고색창연한 옛집은 아닙니다. 솟을대문 높다란 대갓집도 아닙니다. 그저 평범한 시골집입니다. 서해대교 가까운 바닷가 마을, 파란 기와집입니다.

당호(堂號)도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닙니다. 십여 년 전에 제가 지었으니까요. '들을 문(聞), 바닷물 조(潮)'. '바닷물 소리를 듣는 집'이란 뜻입니다. 실제 물결소리가 들리진 않습니다. 그러나 문조당 주인 귀에는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소리가 정말로 들리는 모양입니다.

살갗에 와 닿는 바람결만으로도, 제 친구는 바다의 표정을 읽어냅니다. 빗물을 받듯이 허공에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합니다. "오전엔 파도가 높아서 배를 띄우기 어렵겠어. 점심 먹고 나면 잠잠해질 거야." 바람이 기상캐스터가 되어 포구의 날씨를 중계방송이라도 하는 것 같습니다.

문조당 손님들은 도시에 두고 온 다른 바다를 이야기합니다. 보험전문가는 안개 속 항로를 걱정하고, 역사학자 친구는 격랑을 만난 이 시대에 관해 목소리를 높입니다. 공직에 있는 친구는 새로운 항해지도를 찾고, 교사 친구는 표류하는 청춘의 등대가 되고 싶어합니다.

직업도 일터도 제각각인 친구들 '생각의 파도' 소리가 들립니다. 세월의 파고(波高)에 맞서는 다양한 인생의 방파제가 보입니다. 역사가 어디로 흘러가고, 새 시대가 어디서 오는지 알게 됩니다. '세월(time and tide)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영어 격언에 어째서 '바닷물'이 들어가는지를 깨닫습니다.
[윤제림의 행인일기 91]문조당에서

이 집 벽에다 저 푸른 현판을 붙이던 날이 생각납니다. 한문학 박사 후배에게 부탁하여 받은 서체로 글자를 모아서, 판각(板刻)을 한 것입니다. 마치 친구들 공동명의의 문패를 거는 것처럼 즐거웠습니다. 모임의 명칭을 '하여간(何如間)'으로 바꾼 것도 그 무렵입니다. 어찌할 수 없는! 운명적 관계들이라서 '하여간'입니다.

'하여간'에 새긴 뜻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오랜 친구들, 언제까지나 서로 잊지 못할 '사이(間)'다. 어디서 무얼 하든, 때맞춰 만나지 못하면 그리워서 견딜 수 없는 사이다. 오늘 다툰다 해도 내일은 포옹해야 할 사이다. '하여간'은 우리들 사이를 설명하는 데 가장 적합한 말이다. 우리들 만남에 다른 이유는 모두 사족이다."

이 이름이 제일 도드라지는 곳은 장례식장입니다. 문상객이나 초상집 가족 중 누군가는 이렇게 묻습니다. "하여간이 뭐예요?" 대부분 근엄한 명찰을 달고 있는 화환들 가운데서, '니힐리즘'에 가까운 '하여간' 세 글자가 단연 눈길을 끕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만큼 질긴 인연입니다.

아내들의 모임도 있습니다. '여하간(如何間)'입니다. 그녀들끼리만 일본 온천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지요. 여고 동창생 무리쯤으로만 여겼던 안내원이 자못 신기해하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남편들이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부인네들끼리만 이렇게 해외여행을 나온 사람들은 처음 봤습니다."

문조당 풍경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오랜만에 왔다는 증거입니다. 잔디뿐이던 마당복판에 나무 두 그루가 섰습니다. 반송(盤松)입니다. 주인이 오랫동안 공들여 가꾼 솔밭에 있던 것입니다. 밭에서 마당으로 나왔을 뿐인데 태깔이 달라 보입니다. 아직은, 교실을 빠져나온 사복 차림의 여고생처럼 수줍어하는 눈치입니다.

친구 아내가 차와 과일을 내옵니다. 평상에 앉아 집 주변을 빙 둘러봅니다. 개가 짖고 닭이 소리를 냅니다. 반갑다고 환영의 인사를 보내는 것일 테지요. 거위들과 염소들은 우리가 아직 낯선가봅니다. 저희들끼리 통하는 소리만 반복합니다. 야생화들이 인사를 건네옵니다. '매발톱꽃'이 앞으로 나섭니다. '금낭화'도 보입니다.

푸른 꽃들이 계절의 변화를 알립니다. '녹색의 꽃'들입니다. 꽃을 떨군 자리에 새 잎들이 참새 혓바닥 같은 모습을 드러냅니다. 저것들이 어찌 꽃이 아니겠습니까. 시 한 편이 생각나서 시집을 뒤져봅니다. 건넛마을(부곡리)에 '필경사(筆耕舍)'라는 집을 짓고 살던 '상록수'의 작가 심훈(沈熏)의 작품입니다.

"…시들은 풀잎만 얼크러진 벌판에도 봄이 오면은/하늘로 뻗어 오르는 파란 싹을 보셨겠지요?/당신네 팔다리에도 그 싹처럼 물이 올라서/지둥치듯 비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말라고 비가 옵니다/ 높이 든 깃발이 비에 젖습니다."

'어린이날'이란 제목이 붙었으니, 꼭 이맘 때 정경입니다. 마침 빗방울까지 떨어져서, 문조당이 필경사 마당처럼 느껴집니다. 시인의 말대로 우리네 '팔다리에도', 저 푸른 '싹'에게처럼 '물'을 올려주려고 내리는 비입니다. '땅이 흔들리도록' 세월이 우리를 어지럽게 하여도, 쓰러지지 말라는 하늘의 당부입니다.

유고집 '그날이 오면'에 실린 시지요. 하여간에, 문조당에 비가 내립니다. 좋은 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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