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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81]한복 집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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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동네엔 한복 가게가 있습니다. '가게'라고 하면 주인이 섭섭해 할 수도 있습니다. 진열장 횃대에, 철따라 내걸리는 한복 태깔이 여간 고급스럽지 않은 까닭입니다. 옷감의 질과 바느질 솜씨가, 아무나 주인이 되기 어려운 물건임을 짐작케 합니다. 저 같은 사람은 그저 눈요기나 할 뿐입니다.

한복은 제게 행복을 줍니다.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를 갖춰 입고 나서면, '공경대부(公卿大夫)'가 된 느낌입니다. 흰 고무신이 나를 번쩍번쩍 들어 올려줍니다. 옷고름이 깃발처럼 나부낍니다. 한복을 좋아하는 바람들이 어디선가 마중을 나오고, 온종일 저를 따라다닙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고향사람처럼 반갑고 설렙니다. 아마도, 고등학교 때 국어선생님 영향일 것입니다. 한복을 입을 때마다 그분의 검은 두루마기가 떠오릅니다. 목소리도 들립니다. "현대인은 누구나 실향민입니다. 우리는 모두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조금 생경하지만 이런 비유는 어떨까요? '한복은 우리가 떠나온 공간이나 시간의 유니폼이다.'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떠나오던 날의 차림새와, 우리를 향해 손수건을 흔들던 이들의 입성. 어느 시인의 묘사처럼 한복은, 우리를 차별 없이 '싸안고' 우리를 '안도하게' 합니다.

품이 낭낭해서 좋다.
바지 저고리에
두루막을 걸치면
그 푸근한 입성.
옷 안에 내가 푹 싸이는
그 안도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중략)....
한복.
그것은 입성이 아니다.
비로소 돌아오는 질기고 너그러운
숨결이 베틀질한 씀씀한 생활.
육신을 싸안아 육신을
벗게 하는
무명 바지저고리에 옥색을 물들인
한복.
- 박목월, '한복'
어쩌다 보니, 제게도 '고향의 유니폼'이 두 벌입니다. 삼베옷까지 더하면, 네 벌입니다. 마음만 먹으며, 사시사철 한복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어려운 일입니다. 삼복(三伏)에 몇 번 입고, 잔치나 특별한 행사에 가느라 입습니다. 십년쯤 전에 제자의 주례 부탁을 받고, 한복을 처음 짓던 일이 생각납니다.

'빌려 입어볼까' 했는데, 값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두어 번 빌리는 값으로, 한 벌 지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게다가, 물건들 색깔이나 모양도 마뜩치 않았습니다. '누구에게 물어볼까?' 궁리 끝에, 가까운 국악인에게 물었지요. "거문고 타실 때 입는 옷, 어디서 지으십니까?"

한복 디자이너 한 분을 소개받았습니다. 예인(藝人)들 옷을 주로 짓는 이였습니다. 손님 취향보다는 자신의 직관을 앞세우더군요. 단도직입(單刀直入)! 스크랩북에서 그가 옷감 하나를 가리켰습니다. 제가 마음에 두고 있는 천, 바로 옆의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이겁니다." 그것이 지금 제 두루마기가 될 옷감이었습니다.

"옆의 것은 선생님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걸 입으시면, 아무도 가까이 오지 않습니다. 이걸 입고 그저 미소만 짓고 서계시면, 사람들이 저절로 모여들 것입니다. 입을수록 모양이 나고, 때가 타고 낡아져도 오히려 멋이 날 것입니다. 이것으로 안 하시면, 저도 선생님 옷 안 지으렵니다."

순간, 그가 달리 보였습니다. 옷 꿰매는 사람이거나, 바느질 일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상대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그 옷 입은 이의 무대에 합당한 메시지를 만들 줄 알았습니다. 장인(匠人) 혹은 작가라 해야지요. 전문가입니다. 제 일밖에 모르는 이가 아니라, 제 것으로 다른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입니다.

전문가는 자신의 지혜와 공력(功力)으로, 손님을 빛나게 하는 방식을 잘 압니다. 자기 손을 떠난 물건이 궁극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짚어냅니다. 한복은 훌륭한 '언어'입니다. 지은이의 말대로, 제 한복은 십년 이상 할 말을 다하고 있습니다. 어느 자리에서든, 할 이야기를 잘 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끝난 평창올림픽은 한복 덕분에 더욱 아름다웠습니다. 우리 옷의 미덕과 가치가 가득하면서도, 새로운 느낌의 디자인이 넘쳐났습니다. 잔치마당의 춤추는 치마저고리뿐이 아니었습니다.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는 스포츠 스타들은 늠름했고, 아이들은 앙증맞았습니다. 한복 전문가들의 노력과 보람이 동시에 읽혔습니다.

특히, 노래하는 아이들이 어여쁘고 깜찍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았습니다. 다문화가정 어린이들로 구성된 '레인보우'합창단. 피부색이 제각각인데, 어쩜 그렇게 아름답지요? 폐회식에서 애국가를 부른 강원도 아이들은 종달새 떼였습니다. 천사의 무리였습니다. '비인소년합창단'보다 황홀했습니다.

삼일절 '만세'의 외침 속에 '평화 만세'도 들립니다. 기미년(己未年) '흰옷 물결'을 생각하며, 색동옷 입은 아이들과 광화문 네거리를 행진하고 싶어집니다. 아이들의 미래와 한복의 내일이 궁금해집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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