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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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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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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은 배우 김혜자씨가 아프리카 봉사활동 후 펴낸 책 제목이지만 오래된 영어 속담이기도 합니다. 여자애들은 맞아선 안 돼. 꽃으로도(Girls shouldn't be hit, not even with a flower). 한 해를 돌아보며 이 세계의 끊이지 않는 폭력과 고통을 생각합니다. 전쟁이나 인종차별로 난민이 된 사람들, 기아로 굶주리는 이들, 생명의 가치를 방치하고 사회적 약자를 고립시키는 이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을 만들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어디 먼 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일상이 전쟁터인 양 조마조마하게 사는 이들이 우리 곁에도 많기 때문입니다. "나는 폭력을 사랑합니다." 중학교 입학 첫 날, 긴 몽둥이를 든 선생님에게 들은 말을 대학생이 된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며 몸서리치는 학생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봉사 활동을 하다 늦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폭언과 폭행을 당하고 온 몸과 마음에 멍이 든 학생도 있습니다. 말리는 엄마까지 맞습니다. 성폭행을 당했는데 가해자는 버젓이 학교ㆍ직장을 다니고 피해자만 숨어야 하는 날들이 여기저기서 이어집니다.
지금은 교육 환경이 바뀌었기를 기대하지만 그 때 그 중학교 선생님들은 이렇게 말했지요. 혈기왕성한 남자애들한테는 매가 최고야. 딸을 때린 아비는 이렇게 말할 테지요. 내가 가장인데 내 딸은 내가 보호해야지. 말 안 들어서 자기가 매를 벌었지 나도 마음 아파. 학교나 직장 성폭행은 또 어떤가요. 학생 앞길이 구만 리야. 여학생이 피해자 같지 않게 당돌하던데 진짜 성폭행 맞나. 직장 내 성폭행 사건에서도 피해자는 꽃뱀으로 질타당하기 일쑤입니다.

타인을 동등한 인격체로 인식하는 법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사회에서 인간관계는 나이ㆍ성별ㆍ직위에 따라 서열화 됩니다. 또래들 사이에서도 부모의 지위에 따라 관계가 고착됩니다. 그런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에 길들여진 우리는 피해를 피해로, 고통을 고통으로 인지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언어폭력ㆍ학교폭력ㆍ데이트폭력ㆍ가정폭력 등 다양한 종류의 폭력에 둔감해진 사회에서 우리는 피해자가 안 되는 법만 겨우 배웁니다. 눈치껏 말 잘 듣고 순하게 맡은 역할만 해내는 것. 피해자는 내 탓이라는 자괴감 속에 소외됩니다. 억압이 속으로 파고들어 내상이 깊어지고 드러내지 못한 상처는 먼 시간 뒤 다른 방식의 억압과 병으로 나타납니다.

폭력은 여성ㆍ남성의 문제를 넘어섭니다. 여자애들뿐만 아니라 실은 그 누구도 맞아선 안 됩니다. 폭력에 동반되는 사랑의 말들은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일 뿐, 제대로 된 사랑법이 아닙니다. 힘센 이가 약한 이를 억압하는 원시적인 다스림의 방식에 길들여진 아이는 주체적인 성인으로 자라기 힘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항하는 법도 함께 배우고 가르치고 손을 내밀고 보듬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고 학생은 선생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올바른 기준을 잡아줘야 할 매체와 기관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에는 무심한 편이지요. 생명의 가치는 경시되고 자본과 권력에 대한 경외감만 키우는 사회에서 폭력은 정당화되고 구조적으로 재생산됩니다. 그 뒤에는 다양한 혐오와 비하의 말들이 무성하고요. 새해를 맞으며 다시 힘주어 말합니다. 자본과 권력에 지배되지 않고 생명의 가치가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자고. 그 누구도 그 누구를 때리지 말라고. 힘으로, 손으로, 말로, 심지어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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