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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詩] 몬트리올 서커스/김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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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사진 속 천막 입구에는 '위험한 독 전갈을 배 위에 올려 둔 미소녀'라고 적힌 허술한 간판이 붙어 있었다.

얼굴조차 알려지지 않은 그녀라는 존재가 초기 몬트리올 서커스의 부흥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서로 무심한 우리에게서 사랑을 이끌어 낸 것은 하필 비가 오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기어이 구름을 만들어 내고야 마는 인공 호수 앞에 네가 서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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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이지. 나는 그때 이미 다 알고 있었는데, 당신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바로 그래서 나는 당신을 사랑했지. 아니 사랑한다고 믿어 버렸지. 사람들은 말했지. 당신은 "위험한 독 전갈을 배 위에 올려 둔 미소녀"라고. 그러나 그것은 "허술한 간판" 같은 소문들, 그러나 그것은 "허술"하지만 "간판" 같은 낙인들. 그 소문과 낙인을 넘어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믿고 믿었지. 운명 같았으니까, "하필 비가 오고 있었"으니까, 당신이 바로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그래서 시작되었지. "서커스" 같았던 사랑, 공중곡예 같았던 사랑, 매순간 목숨을 걸고서야 간신히 버틸 수 있었던 사랑. 그래 그때 벌써 다 알고 있었지. 내가 사랑한 건 당신이 아니라 실은 "얼굴조차 알려지지 않은 그녀라는 존재"였다는 걸. 그러나 이상한 일이지. 정말 이상한 일이지. 나는 당신을 진짜로 사랑하게 되었지. 그렇게 되어 버렸지. "서커스"가 끝나고 떠나듯 당신 또한 어김없이 떠나자 내 사랑은 마침내 완벽해졌지. 텅텅 빈 공터에 앉아 "기어이 구름을 만들어 내고야 마는 인공 호수" 하나 꼭 끌어안고 당신을 사랑했었다는 것을, 아니 애초부터 이 세상에 없었던 당신을 비로소 사랑하게 되었지.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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