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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27] 신문가판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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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소설가 A씨의 등단 무렵 일화입니다.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심사위원 중의 한 분인 B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답니다. 수줍은 얼굴, 황송한 마음으로 절을 올렸답니다. 극진한 예의를 갖추었을 것입니다. 문단의 큰 어른인데다가 존경해마지 않던 작가였으니까요.

한없이 떨리는 자리였겠지요. 저도 경험해보아서 압니다. 직접 뵙는 것 자체가 영광스러운 분 앞에서 병아리 작가는 숨소리도 크게 내기 어렵습니다. 비유하자면, 장군과 이등병이 마주 앉은 격입니다. 신인배우가 슈퍼스타 대선배를 만난 경우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대가들의 음성은 대개 천상의 소리처럼 따뜻하고 거룩하지요. 그런데 그날 A씨가 B선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온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충격적이었습니다. "나는 자네를 뽑지 않았네." 세상에!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선고일까요. 당신은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다니.

눈앞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외로움과 서러움에 울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너는 내 친자(親子)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은 아이처럼 막막했겠지요. 자신을 버리고 개가(改嫁)한 어머니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한 자식의 슬픔처럼 아득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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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B선생의 언사(言辭)는 너무 가혹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자네 작품은 내 문학적 신념이나 가치관과는 거리가 있어서 나는 자네를 뽑을 생각이 없었다네. 하지만, 함께 심사한 사람은 무척 반겨하더군. 모쪼록 좋은 작가가 되길 바라네."
그렇게 말했더라도 섭섭했을 텐데, 대놓고 '자네의 등단은 내가 동의하지 않았다'고 할 것까지야! 상처가 힘이 되었을까요. A씨는 훗날 빛나는 작가가 됩니다. B선생처럼 명사(名士)가 되고 소설을 가르치는 대학교수도 됩니다. 신춘문예 심사위원도 됩니다.

두루 알다시피, 신춘문예는 일종의 '고시(考試)'입니다. 고작 몇 사람을 뽑는데 수천 명이 응모를 합니다. 그런데도 지독히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게임이지요. 비교조차 허락되지 않아야 할 내용의 텍스트들이 눈금도 분명치 않은 잣대로 우열(優劣)이 가려집니다. 뽑히는 자와 떨어지는 자의 간격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저는 해가 바뀌고 며칠은 신문가판대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얼마나 좋은 시인이 뽑혔는지, 얼마나 좋은 소설이 나왔는지 설레는 맘으로 신년호(新年號)들을 펼쳐듭니다.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30년을 보내며 연초(年初)마다 거듭해온 제 통과의례입니다.

등단의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그러나 새내기 문인으로서의 긴장과 설렘이 어려 있는 문청(文靑)들의 싱그러운 얼굴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시와 소설, 동화 등이 고루 들어있는 신문 한부를 사면 마치 새로 나온 '세트메뉴'를 앞에 놓은 청소년처럼 행복해집니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고 외출하는 시간이 즐거워집니다.

당선소감과 심사평을 읽는 맛은 특히 쏠쏠합니다. 그것은 남의 결혼식에 가서 자신의 결혼식을 회상하는 일과 비슷합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신랑의 자리에 제 자신을 세우고 주례사에 귀를 기울여보기도 합니다. 남의 혼사에서 스스로의 결혼생활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지침을 얻는다는 것은 제법 큰 보람이지요.

그러니까 저는 초심(初心)을 확인하기 위해 거리를 헤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이로 된 신문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신문을 파는 곳도 흔치 않고, 편의점 같은 곳에 가보아도 흔한 신문 몇 가지 밖에 없습니다. 물론 인터넷으로 볼 수도 있지요. 그러나 거기선 문자의 표정이나 문장의 풍경이 잘 읽히지 않습니다.

세상이 어수선해서 그런지 시와 소설을 읽는 마음도 편치 않습니다. 떨어진 사람들 생각이 더 많이 납니다. 당선자보다 낙선한 문사(文士)들이 자꾸 밟힙니다. 취업준비생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한 젊은이들이 포개집니다. 합격자보다 많게는 몇 십, 몇 백 배 더 많은 불합격자들이 제 아이들처럼 떠오릅니다.

B선생 같은 분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B선생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B선생보다 훨씬 더 눈 밝은 이가 있어 A씨는 훌륭한 소설가가 될 수 있었지요. 분명한 것은 어딘가는 자신의 진면목을 알아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지요.

낙선(落選)과 낙방(落榜)은 더 좋은 기회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B선생들이 걸핏하면 퇴짜를 놓는 이유 또한 그런 것 아닐까요. 누가 귀인(貴人)인지를 넌지시 일러주려는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렇게 가혹한 핍박을 통해 더 큰사람이 되게 하려는 복선(伏線)일지 누가 압니까.

어쩌면 B선생 같은 분도 그리 고약한 분은 아닐 것입니다. 참고 지켜가야 할 것과 순순히 내려놓고 돌아가야 할 길을 아는 분일지도 모르니까요. 무릎을 꿇고 가르침을 청해야 할 분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이가 진정한 귀인인지도 모릅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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