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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20세기 소녀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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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어느 잡지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자가 어째서 사람대접을 받아야 하나." 이 문장으로 특집 제목을 달고, 광고를 냈습니다. 입바른 소리만 골라서 하던, 그래서 수명이 길지 못했던 월간지였습니다. 형식과 내용이 대단히 새롭고 낯설었습니다. 착상과 발언이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말투부터 시비조(是非調)가 많아서, 이 책의 일거수일투족이 못마땅한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가지고 누리는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랬습니다. 불편한 심기를 애써 감추며, 아예 불온매체 취급까지 했지요. 신군부가 '언론 통폐합' 리스트에 이 잡지를 포함시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처사였는지도 모릅니다.
을(乙)이나 약자 편을 드는 것만으로도 불순세력이 될 수 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여성들은 다음과 같은 한마디에 아무런 항변도 못했습니다. "여자가 무슨!" "여자는 자고(自古)로…" 모든 지배계층이 피지배계급을 길들이던 언사는 비슷했습니다. "…란 모름지기!" "…주제에 감히!"

그런 세상에, 이 잡지는 여성들의 간난고초(艱難苦楚)를 자주 도마 위에 올렸습니다. 우리 누이와 언니, 엄마와 고모, 할머니와 외할머니들 이야기였습니다. 이 무렵 여인들 몸무게는 부당함과 불합리와 부적절함의 중량이었습니다. 굴종과 인욕 따위 사나운 어휘들이 항상 붙어 다녔습니다.

세상은 여인들에게 철인(鐵人)과 성자(聖者)의 인내력을 요구했습니다. 과다한 노동력을 주문했습니다. 열서너 살이면 사회가 손짓을 했습니다. 대부분의 소녀들에게 초등학교 교문 밖은 일터였습니다. 상급학교 가듯이 서울, 부산 등지로 떠났습니다. 슬픈 소녀시대의 시작이었습니다.
방직공장, 고무공장, 봉재공장이 많았습니다. 구로공단이나 청계천 혹은 마산수출자유지역 같은 곳이었습니다. 성실 근면한 '공순이'들이 줄을 섰습니다. '노동3권'이나 근로기준법 같은 용어도 모른 채, 정직한 노동의 시간을 조국에 바쳤습니다. 기계와 단짝이 되고, 재봉틀과 한 몸이 되었습니다.

밤새 재봉틀을 돌렸습니다. 그 장면이 이러했습니다. "돌리는구나 쉬이 늙은 에미애비를 위해/돌리는구나 더디 크는 어린 동생들을 위해/돌리는구나 나라를 위해/돌리는구나 행복한 꽃님이들 위해/돌리는구나 졸면서/돌리는구나 울면서/돌리는구나 지친 몸으로/돌리는구나 시집가는 날 꿈꾸며"(졸시, '브라더 미싱' 중에서)

오늘의 '걸 그룹'처럼 어여쁜 꽃 시절을, 도구와 수단과 부품의 세월로 떠나보냈습니다. 덕분에 '수출한국'이 세워졌습니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들 지낼까요. 안부가 궁금해집니다. 인권이니 '미투'니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때 그 소녀들의 서럽고 고단한 날들이 눈에 밟힙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쁜 어른들도 많아서, 세상은 소녀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땀과 시간만 빌려 쓰기로 하고, 너무 많은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소녀들을 짓밟은 사람들은, 제국주의자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식민지시대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지난 광복절 기념식에서, 대통령이 여성 독립 운동가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름다웠습니다. '광복'의 의미가 되뇌어졌습니다. 그것은 광명이, 천지간에 차별 없이 펼쳐지는 순간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광복은 미완(未完)의 개념입니다.

찾지 못한 그늘과 어둠을 발견해내야 합니다. 호명되지 못한 은인의 이름을 불러내야 합니다. 그런 생각 끝에, 땀과 눈물로 얼룩진 소녀들 얼굴이 보입니다. 또 하나의 소녀상을 세우고 싶어집니다. '공순이'상, 아니 '20세기 소녀시대' 상입니다. 언뜻 떠오르는 장소는, 서울역 광장이나 플랫폼 혹은 버스터미널입니다. 

윤제림 시인ㆍ서울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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