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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생각하며] 세상에 '맞을 짓'은 없다

최종수정 2018.06.05 12:59 기사입력 2018.05.31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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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늦은 밤 문경란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정 교수, 심석희 선수가 맞았다는데 정말 참을 수가 없네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도대체 체육계는 언제까지 이런 일이...'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이사 시절 체육계에 스포츠인권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했던 고마운 분이다. 체육계 한 사람으로 늘 빚진 마음을 가지고 있다. 경찰개혁위원으로 장애인인권영화제 위원장으로 그 바쁜 분이 지난 1년 내내 스포츠인권을 공부하려는 학생들을 위해 세미나를 열어 재능기부를 하고 계신다. 갑자기 전화를 받고 어정쩡한 자세로 체육계에 만연한 폭력의 대물림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다보니 이 분이 이걸 몰라서 내게 전화를 했을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내가 칼럼 하나 쓴다고 이게 바뀔까 싶지만 그래도 안 쓸 수가 없네요'라고 하시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스포츠인권에 대한 책까지 쓰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스포츠인권을 떠들던 스스로가 부끄럽다. 그동안 뭘 했나하는 자괴감이 후려친다. 다음 날 페이스북에 공유된 그녀의 글을 읽는다. 지금 나도 이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 선수가 맞았다. 지난 소치올림픽 고등학생으로 국가대표로 발탁되 월등한 기량으로 금메달을 따내던 장면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다. 어린 그녀의 자질을 알아보고 발탁해 14년을 키웠다는 바로 그 코치에게 맞았단다. 무차별 구타였다. 골방에서 두드려 맞고 웅크리고 있는 어린 금메달리스트.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장면이다. 평창동계올림픽 직전 문재인 대통령이 쇼트트랙 국가대표 격려차 진천 선수촌에 방문했을 때 심석희 선수가 보이지 않았던 게 빌미가 되어 우연히 세상에 알려졌다. 전날 코치의 구타가 있었고 대통령이 활짝 웃으며 방문했던 날 심석희 선수는 두려움과 모멸감에 선수촌을 무단이탈한 상황이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인지도와 대통령의 방문이라는 우연이 겹쳐 그나마 이렇게라도 알려진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해당 코치는 협회로부터 영구제명이라는 징계를 받았고 올림픽 직전 퇴출되었다.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베이징동계올림픽을 준비하는 중국 쇼트트랙 대표팀에 합류했다고 한다. 중국 선수들은 안 때릴까 걱정이다.

알려진 끔찍한 구타보다 더 끔찍하지만 쉬쉬하면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금메달리스트가 자국에서 열리는 역사적인 올림픽을 앞두고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코치에게 골방에 갇혀 맞아도 대통령 방문이라는 행운이 깃들어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진다. 엘리트스포츠계에 잠시라도 발을 들여놓았던 선출(선수출신)치고 선수시절 코치나 선배들의 가혹행위나 폭력에 시달리지 않은 선수가 없다. 한 번쯤은 도저히 못 참겠다고 동료선수들과 합숙소에서 도망쳐 며칠 후 잡혀와 또 맞았다는 무용담(?)은 너무 익숙해 식상하다.

지난 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아이스하키 코치를 만나 대학시절 구타경험을 들었다. 그가 다녔던 대학은 아이스하키 명문교다. 대학 2학년 때 북유럽의 아이스하키 선진국으로 전지훈련을 갔을 때 이야기다. 너무 맞아서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선수들이 숙소를 이탈했단다. 이역만리 말도 안 통하는 타지에서 오죽했으면 도망갔을까? 무슨 생각이었냐고 했더니 막연히 대사관을 찾아가 망명을 신청하려고 했다면서 씩 웃는다. 가지고 있던 돈도 다 떨어져 노숙을 하며 쫄쫄 굶다가 시내 식당에서 피자를 시켜놓고 먹지도 못하고 붙잡혀 갔다. 눈앞에 있던 피자를 먹지 못한 게 너무 아쉽다는 그는 끌려가 코치에게 맞다가 기절했다. 더 놀라운 건 그 감독이 귀국에 지도자생활을 계속 했다는 점과 그렇게 때렸어도 자신의 기량향상에 큰 도움을 줬기 때문에 지금도 욕할 수 없다는 젊은 코치의 태도였다. 맷정.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때리면서 그리고 맞으면서 둘 사이에 깃드는 끈끈한(혹은 지긋지긋한) 정. 맞다가 기절했던 이야기를 하면서 체념한 듯 씁쓸하게 웃는 그를 보며 이런 폭력의 대물림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때리면 안 된다고 아무리 이야기 한들 때리고 맞는 사람 사이의 끈적끈적한 맷정이 존재하는 한 폭력의 대물림은 계속될 것이다.

그들은 왜 계속 때릴까? 그 이유는 어쩌면 지극히 단순할지도 모른다. 그들이 때린 이유는 맞아봤기 때문이다. 때리는 방법 이외의 다른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때리고 맞으면서 서로 정이 들었으리라.
방탄소년단의 Fake Love가 빌보트 차트 10위를 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세상에 맞을 짓은 없다. 거짓 사랑이다.

정용철 서강대 교수ㆍ문화연대 공동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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