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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삶터] 슬로우 트래블 

최종수정 2017.04.25 09:28 기사입력 2017.04.25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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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경 잉글리시컨설팅그룹 대표

케빈 경 잉글리시컨설팅그룹 대표

봄이 되면 내가 속한 스키동호회는 버스를 대절해 연례 식도락 나들이 여행을 떠난다. 꼭두새벽 서울에서 출발하는 왕복여행으로 당일치기로 진행한다. 작년 전라남도 순천과 여수 여행에 이어 올해는 4월 중순 토요일에 보성과 해남을 다녀왔다.

원래 계획은 야심 찼다. 먼저 보성에서 녹차밭에 들렀다가 벌교에서 점심을 먹고 해남에서 대흥사를 둘러 본 후 땅끝마을에 갔다가 저녁을 먹고 다시 상경하는 것. 누가 봐도 알찬 일정이었다. 애초 몇몇 운영진과 세부적인 일정을 짜면서 내심 뿌듯했다. 일년에 딱 한번 단체로 가는 장거리 봄 여행인데 가능한 많은 명소에 들르고 되도록 많이 먹어야 하지 않나, 하는 논리였다.

비 예보까지 빗나간 화창한 당일, 보성으로 향한 버스 안 분위기는 무척이나 밝았다. 여기에 일정을 더욱 알차게 할만한 누군가의 즉흥적인 발상이 이미 들뜬 마음을 자극했다. 남도에 가는 참에 해남 명소 한 곳을 생략하고 담양에 있는 죽녹원을 일정에 포함하면 어떨까. 그럴 듯했다. 보성과 해남에 담양까지 추가하면 남도 소도시 세 곳을 다녀오는, 참으로 보람찬 여행이 될 터. 일단 가능성을 열어 놓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녹차밭에 도착하니 상황은 달라졌다. 예상보다 멋지고 규모도 컸다. 대충 훑어보긴 아까운 풍경이었다. 짧은 코스부터 긴 코스가 있었지만, 단체여행 특성상 여기저기서 셀카는 기본, 이 사람 저 사람, 또 단체로 사진도 찍고, 앞서가는 사람도 있고 더 천천히 가는 사람도 있기 마련. 박진감 넘치는 가위바위보 내기로 녹차 아이스크림 쏘기까지 하면서 스케줄은 더욱 느슨해졌다. 푸른 하늘 아래 녹색 자연은 마냥 좋았다.

벌교에서 푸짐한 꼬막정식 점심식사를 마친 후 우리 일행은 다시 버스에 올라 해남 땅끝마을로 향했다. 길이 막혀 3시가 훌쩍 넘어서야 도착한 땅끝마을 해변가 역시 대충보고 갈 곳이 아니었다. 게다가 버스기사님 왈 "서둘러봤자 담양 죽녹원 문 닫기 전에 도착 못해요"라고 한다. 모노레일을 타고 전망대에 오르니 4시, 전망 좋은 커피숍에서 단체로 커피 주문 하고 기다리면서 잡담하고 마시고 나와서 사진 찍은 후 다시 모노레일 타고 내려오니 5시 반이었다.
해남 시내에 있는 유명 떡갈비 식당에 도착한 건 약 한 시간 후. 신선하고 다양한 반찬으로 빼곡하게 차려진 상이 나오자 감탄이 터져 나왔다. 정말 정신없이 먹었다. 어느새 깜깜해진 밖으로 나온 회원들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때 문득, 이 기분 좋은 포만감은 비단 맛난 저녁상에서만 오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포만감은 그날 하루에 대한 만족감이었다. 가능한 많은 명소를 수박 겉핥기 식으로 서둘러 둘러 본 것과는 확연히 다른 기분이었다. 보성녹차밭과 해남땅끝마을 전망대 구석구석을 푸짐하게 차려진 상 위의 반찬처럼 하나씩 제대로 맛보고 음미한 느낌이랄까.

목적지 세 곳이 두 곳으로 줄어든 게 오히려 덕이 됐다고 모두 입을 모았다. 마침 회원 중 친한 형은 아내와 함께할 5월 이탈리아 여행 계획을 10일로 세웠다고 했다. 일정은 대충 잡고 어떤 한 곳이 좋으면 그곳에서 더 머무를 거라고. 마음에 드는 곳 있으면 더 깊이 더 자세히 보고 즐기겠다는 취지란다.

이 원고를 쓰면서도 입에 맴도는 떡갈비 맛처럼 그날 하루의 여운이 느껴진다. 서두르지 않고 쉬엄쉬엄 보고 찍고 느끼고 맛 본 순간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이른바 슬로우 시대라고 한다. 슬로우 푸드처럼 슬로우 트래블도 힐링에 안성맞춤일 듯하다. 쫓기는 듯한 여행이 아닌, 느슨하게 잡은 일정 안에서 특히 끌리는 곳에 조금 더 오래 머무르는, 그런 여유 있는 여행.

케빈 경 잉글리시 컨설팅 그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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