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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호의 라이브 리뷰] 깃털 같은 몸짓, 강철 같은 단련

최종수정 2018.11.08 12:45 기사입력 2018.11.08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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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쇼이 발레단 수석 무용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한정호 객원기자

한정호 객원기자

실비 길렘, 니나 아나니아시빌리, 울리아나 로파트키나의 은퇴 이후 2010년대 후반 '전설적인 발레리나'로 칭할 발레리나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마린스키 출신의 디아나 비시네바가 클래식 발레 은퇴를 선언한 시점에서, 볼쇼이 발레의 프린시펄(수석 무용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는 스타성에서 세계 최고 클래스의 발레리나다.

자하로바가 유니버설 발레단(UBC) 초청으로 지난 1일과 4일 전막 발레 '라 바야데르' 공연을 위해 세종문화회관에 올랐다. 볼쇼이 발레의 파트너 데니스 로드킨과 함께 한 무대였고 2005년 볼쇼이 발레 '지젤' 이후 13년만의 내한이었다. 적은 볼쇼이에 두지만 자하로바는 시즌 중에 밀라노 라 스칼라,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도쿄 신국립발레단에 자주 출연했다. 발레 시장에서 변방인 한국에 오게 된 계기는 어려서 친분을 유지한 UBC 유지연 부예술감독과의 인연으로 본인이 밝혔다.

내한 동안 자하로바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를 모았다. 3000석을 초대로 채우기도 어려운 세종문화회관이 자하로바 공연일에는 사실상 유료 매진을 거뒀고, 일부 미디어가 '세기의 발레리나'로 칭하면서 신비감이 증폭됐다. 춤을 본 적은 없지만 자하로바가 궁금해서 공연장을 찾은 이들로 로비가 북적였다. 이미 공연장 밖에서 자하로바의 존재감은 입증됐다.

자하로바는 1979년 구소련 시절 우크라이나 루치크 태생으로 키예프 발레학교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바가노바 아카데미를 거쳐 1996년 볼쇼이의 라이벌, 마린스키 발레에 입단했다. 2003년 볼쇼이로 이적했고 바이올리니스트 바딤 레핀과 가정을 이뤄 딸 하나를 두고 있다. 러시아 여당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국회에서 문화와 체육 관련 행정을 맡았고 크림 반도 분쟁에선 태어난 우크라이나 대신, 러시아를 지지해 고국에선 배신감을 공개적으로 토로하는 무용가들이 부지기수다. 소치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러시아 국격을 대변하는 행사에 공식 아티스트와 사절로 출연한다.

출산 이후 체형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연체동물 같았던 비범한 유연성은 조금씩 퇴화하는 느낌이다. 170㎝ 중반의 큰 키와 모든 생활이 다이어트로 연결되는 가혹한 단련은 스타군단 아메리칸 발레시어터(ABT) 활동 당시 차갑고 신비스런 아우라로 연결됐다. UBC '라 바야데르'는 자하로바의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30대 후반에 들어선 2018년을 기준하면 클래식 발레를 마무리 짓는 황혼작으로 제격이다.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C)Timur Artamonov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C)Timur Artamonov

자하로바와 오랫동안 함께 한 무용수들은 체력 유지와 다이어트 뿐 아니라 당일 상황에 맞게 최고의 감각을 유지하는 프리마의 루틴을 칭송한다. 발레 전막에서 주역이 감정을 모두 소진하기까지,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연기는 맥을 잃게 된다. 파트너의 당일 상태를 확인하고 상대방의 미묘한 변화에 따라 손의 움직임부터 마음이 가능 방향을 달리하면 어제와 오늘의 연기가 확 달라진다. 자하로바가 연륜이 들수록 20대 시절보다 연기가 무르익었다는 평가를 받는 건 불혹을 앞에 두고도 완전한 체력을 유지하는 성실한 몸 관리와 독서 덕분이다. 가녀리지만 심지 굳은 연기가 가능한 원천이다.

돌이켜보면 사춘기 시절, 체중이 늘면 졸업 직전이라도 일반학교로 보내는 바가노바의 가혹한 훈육이 지금도 벌크로 불지 않는 생체 구조를 굳혔다. 기숙사에서 한 방에 일곱 명씩 비슷한 기량의 동급생들과 생활하면서 벌인 생존 경쟁을 시작으로 자하로바는 성장의 모든 단계가 경쟁이었다. 그러나 발에 물집과 피가 맺히고 관절을 혹사시켜서 얻은 과실을 발레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눠주지 않는다. 아카데미 시절 누가 어디에 입단할지 알지만 이기심을 표출하면 발레 세계에서 일찍 도태되는 점도 자하로바는 명찰했다. 그래서 프로 입단 시절부터 자하로바는 라이벌에 대한 강박을 드러낸 적이 없고, 라이벌들도 자하로바는 특별한 존재로 여겼다. 신체적 차이가 캐스팅의 자연스런 위계로 이어졌다.

UBC '라 바야데르'에서 자하로바의 연기와 기량은 가히 세계 최고의 니키아상을 한국 팬에 선사했다. 깃털처럼 몸체가 가볍게 흩날리면서 무대를 꿈과 환상의 공간으로 만드는 능력은 여전히 독보적이다. 아름다운 몸매와 냉철한 마스크가 신을 섬기는 무녀보다 연인에 가까웠다. 매우 정감 있는 맵시로 개별 동작이 노래처럼 들리도록 감정의 흔들림을 입체적으로 전했다. 과거에 비교 캐릭터가 있다면 마린스키의 알티나이 아실무라토바 정도다.

다만 감자티를 맡는 국내 댄서와 자하로바의 키 차이가 현재 UBC와 국내 발레단이 세계 수준을 체감하는 벽이다. 그러나 서른두 명 군무진의 조직력을 제대로 키우기 어려워 '라 바야데르'를 주저했던 한국에서 UBC는 이를 제대로 성취한 최초의 조직이다. 자하로바에 쏠리는 국내 관객의 관심이 온전히 단체에 주어지지 않는 현실이 괴롭지만, 그것도 발레가 가진 지독한 일면임을 헤아리는 배포가 요구된다.

자하로바는 내년에도 한국에 온다. 남편 레핀과 함께 하는 발레 프로젝트 '투 애즈 원(Two As One)'을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의 반주로 롯데콘서트홀에 올린다. 자신이 좋아하는 클래식 발레 가운데 음악성이 돋보이는 단편들을 레핀의 연주에 몸을 싣는 작업이다. 바이올린과 발레에서 세계 최정상의 아티스트가 결합하는 그림만으로 이미 지난 5년 동안 큰 화제를 모은 프로젝트다. 인터뷰 내내 냉철함을 유지하다가도 남편과 아이 이야기만 나오면 함박웃음을 숨기지 않는다.

기술과 유연성을 들어 무용수의 은퇴 시점을 거론하는 질문을 접하더라도, 기계적으로 웃는 자하로바의 매너가 롱런의 비결이다. 은퇴 전까지 자하로바는 자신의 인간성과 인생관을 투영한 작품으로 관객과 만나려 한다. 그녀는 다시 전막으로 한국에 올 수 있을까?

한정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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