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오늘날 독일의 금융중심지이자 런던과 함께 유럽 금융허브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프랑크푸르트(Frankfurt)는 헤센주(Land Hessen)에 속해있다. 19세기 중엽 독일이 통일되기 이전에는 헤센 공국이란 독립적인 나라가 존재했던 지역이다.
헤센용병의 탄생 배경에는 근대 초기 독일의 역사는 물론 오늘날 세계 전쟁 및 외교사를 뒤바꾼 사건으로 알려진 '30년전쟁'이란 처참한 전쟁이 도사리고 있다. 주요 전장이었던 독일 중남부 일대의 바바리아와 헤센 지역은 30년전쟁으로 쑥대밭이 됐고, 농경지, 산업시설 할 것없이 거의 다 파괴돼 살아남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남의 전쟁에 대신 나가 싸워주는 용병업만 남아있었다.
1700년대 중반이 되면서 헤센의 주요 고객은 영국으로 압축된다. 왕실끼리 인척으로 얽힌데다 당시 전 세계적인 식민지 사업으로 막대한 자본력을 보유하게 된 영국이 헤센 용병을 대규모로 사들여 전투에 투사시키면서 수많은 헤센인들은 돈을 위해 죽어갔다. 좀더 효율적으로 용병을 뽑아내기 위해 헤센의 지도자들은 헤센 전체를 3개의 영역으로 분리했다. 용병으로 판매한 병사들을 징병하는 지역과 후방에서 방어군을 뽑을 지역, 그리고 징병을 면제받는 대신 막대한 세금을 내야하는 구역으로 3분한 것이다.
16~30세에 해당하는 모든 남성들은 징병대상이 됐고, 무려 24년이란 기나긴 기간동안 의무 복무해야했다. 그럼에도 당시에는 이 지역에 할만한 산업이 전무했고, 병사들은 급료도 높은데다 가족들에게 보낼 액수도 적지 않았다. 아들 한명이 전쟁에 나가 싸우면 한달 급료로 소를 한마리 살 수 있었을 정도로 급료를 보장해줬기 때문에 헤센의 청년들은 목숨을 담보로 전 유럽과 식민지 지역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들이 가장 많이 희생된 전쟁으로 알려진 것은 미국 독립전쟁 때다. 당시 영국의 조지3세는 미국 16주 전역의 진압군으로 헤센 용병을 대거 고용했으며, 3만명 가량이 미국 독립을 진압하기 위해 팔려갔다. 전체 원정군 중 1만7000명 정도가 전후 돌아왔지만, 사상자가 엄청났고 개중에는 전투 도중 미군으로 돌아서서 미국에 아예 정착하게 된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오늘날 독일계 미국인 중 조상들이 이때 정착한 사람들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헤센 용병대는 이후 프랑스혁명 당시에도 영국의 주요 용병대로 고용돼 프랑스 혁명군과 싸우는데 동원됐고, 비슷한 시기 발생한 아일랜드 봉기 진압에도 동원돼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며 전 유럽에 악명을 떨친다. 이후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집권하면서부터는 다시 나폴레옹의 용병대로 활약했다. 고용주에 따라 학살의 도구로 이용되던 헤센의 운명이 바뀐 것은 1871년, 통일 독일제국이 선포되고 헤센이 완전히 독일의 일부가 되면서 끝나게 된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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