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길
[아시아경제 김세영 기자]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서 26년 8개월의 삶을 마친 청년이 있다. 이름은 맹의순. 그의 마지막 말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이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포로들에게 믿음을 전하다 세상을 떴다고 한다. '십자가의 길'은 맹의순의 육필일기와 그에 대한 해설을 묶은 책이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 편집했다. 일기를 영인한 부분, 한자와 외국어가 뒤섞인 내용을 현대 한국어로 옮긴 부분, 맹의순의 삶을 정리한 신재의의 논문 등이다.
맹의순은 1926년 1월 1일 평양에서 태어나 연희전문학교 신학과에 입학했다가 서울 남대문교회 중등부 교사로 일했다. 그러다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1947년 조선신학교에 입학한다. 영어, 일본어, 헬라어가 능숙했다고 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난을 떠났다가 인민군에게 붙잡히고, 탈출 후에는 다시 미군에게 붙잡혀 거제 포로수용소에 수용된다.
그의 일기에는 첫사랑 여인 재금, 김순봉 대위를 향한 마음, 자신의 부족함 한탄, 수용소 내의 인간적 갈등,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 사건 주동자의 정체를 안 이후 괴로워하는 내용 등 인간적이고도 솔직한 내면의 기록이 담겨 있다. 억울하게 포로가 되어 좌절하기도 하였으나 포로수용소로 부른 신의 뜻을 끝까지 성찰하고 따르고자 노력했다. 그의 삶은 석방 사흘 전에 끝났다. 사인은 뇌암(또는 뇌막염)이었다고 한다.
맹의순은 죽기 전에 중공군 포로들의 얼굴과 발을 씻겨주고, 시편 23편을 중국어로 읽어줬다고 한다. 그 중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대목을 큰 소리로 읽은 뒤 쓰러져 미군 병원으로 후송됐다. 그는 지켜보는 이 아무도 없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시편 23편은 이렇게 끝난다.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이 책은 맹의순의 맹렬한 종교적 신념으로 가득 찼다. 예를 들어 "'왜 당신은 그리스도를 믿는가?'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여 '마호메트교는 현세적 쾌락(carnal pleasure), 유교는 윤리도덕(moral), 불교는 갈등(confliction)이나, 기독교는 이 아무것도 아니고, 죄악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하였다"는 대목에서 적잖은 독자가 고개를 갸웃할지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도가 '뭐 해주시오, 뭐 해주시오' 하고 소원을 비는 구복행위가 아님을 선언하는 데서 맹의순의 순수를 볼 수도 있다.<십자가의 길/맹의순 지음/홍성사/1만3000원>
김세영 기자 ksy123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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