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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몸으로 쓰는 이야기] 낙화(落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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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하여 먼 데 사는 현학(顯學)이며 예술가들과 소통한다. 그들의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같은 SNS 계정에는 어느 사이 봄꽃이 흐드러졌다. 춘신(春信)은 거침없이 북상하고 있다. 전라도 화순에 사는 소설가 정찬주 선생이 지난 4일에 홍매 향을 가득 담아 '카톡'으로 보내자 경기도 안산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시인 윤제림 교수가 13일에 수양매화 한 떨기를 사진 찍어 화답하였다. 소설가는 안되겠다 싶었던지 나흘 뒤 광양 매화꽃비를 냅다 흩뿌려 '춘신보도경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사진 속 광양의 꽃비는 장하기 그지없어, 상춘객들이 우산으로 꽃세례를 가까스로 감당할 지경이었다.

무릇 꽃이란 그 생애의 모든 국면에서 우리에게 행복과 상념을 동시에 안겨준다. 가지에 물이 올라 기어코 싹을 틔울 때 우리는 생명의 힘과 인내를 실감한다. 꽃이 피어 여린 잎이 바람에 흔들리다 이내 만개하여 지천에 봄을 외치니 마침내 기운생동(氣韻生動). 그러나 절정은 그 마지막에 있으매 낙화(落花), 곧 작별의 의식이다. 마당 한편 고고한 목련이 생채기 하나 없는 순결한 몸을 대지 위에 던질 때이거나 벚꽃 소나기 아래에 섰을 때 우리는 설레는 마음 저 뒤에서 밀려드는 비애를 감지한다. 그래서 뭇 시인이 그 장렬함을 노래했거니와 나는 우리말로 시를 지은 무리 중에 으뜸을 다투기로 이형기와 지훈 조동탁을 꼽아 마땅하리라 본다. 두 시인이 모두 시제를 '낙화'라 하였다.
꽃이 지기로소니/바람을 탓하랴//주렴 밖에 성긴 별이/하나 둘 스러지고//귀촉도 울음 뒤에/머언 산이 다가서다//촛불을 꺼야 하리/꽃이 지는데/꽃 지는 그림자/뜰에 어리어//하이얀 미닫이가/우련 붉어라//묻혀서 사는 이의/고운 마음을/아는 이 있을까/저어하노니//꽃이 지는 아침은/울고 싶어라 <조지훈>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봄 한철/격정을 인내한/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분분한 낙화/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지금은 가야 할 때//무성한 녹음과 그리고/머지않아 열매 맺는/가을을 향하여/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헤어지자/섬세한 손길을 흔들며/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나의 사랑, 나의 결별/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내 영혼의 슬픈 눈. <이형기>

지훈은 내면의 창을 슬쩍 열어 뜨락에 물든 계절의 징후를 진찰한다. 그의 내면은 공명하거니와 은은한 빛은 미닫이를 넘어 마음 속 깊은 자리를 물들이지 않는가. 은둔한 선비의 올곧음, 그 굳센 단절이 잠시 서글프다. 이형기는 결별을 감내하고 있다. '나'는 '그'의 등 뒤에 서서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본다. 오래 오래. 그는 멀어져 한 뼘, 한 점 크기로 지워져간다. 이윽고 나는 걸음을 돌이켜 제 길을 걷는다. 등은 작별의 언어다. 마지막 한 모금 사랑을 머금었다가 왈칵 눈물 한 방울, 흐느낌 한 호흡으로 삶의 절정을 환기한다. 아직 서울에 꽃소식이 없으나 서둘러 낙화를 이야기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우리는 등에 너무 오래 매달려 있었다.
문화스포츠부국장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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