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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33] 용문산 자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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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이맘때면 저는 이곳을 찾아옵니다.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사나사(舍那寺)' 골짜기. 절로 가는 길이 무척 아름다워서 뒷짐을 지고 어슬렁어슬렁 걸어도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벼랑 끝 소나무들이 흐린 눈을 씻어주고, 엎드려서 그냥 입을 대고 마셔도 좋을 청정수가 심신을 간지럽힙니다. 계곡 물길의 절반쯤은 아직도 눈과 얼음에 덮여있습니다. 서늘한 기운, 신령한 바람소리 때문일까요. 바윗돌 하나 예사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함씨의 시조가 태어났다는 구멍 '함왕혈(咸王穴)'도 그중 하나지요. 제주도 '삼성혈'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만큼 청량한 대기가 전설조차 사실로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둘레가 '이만 구천 척(尺)'이 넘었다는 산성 '함왕성(咸王城)' 터전도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용문산 안개 두르듯 한다'는 속담이 공연히 생긴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당연히 이 산 언저리엔 수수께끼 같은 일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용문산 옛 이름 '미지(彌智)'도 원래는 '용'을 가리키는 옛말의 하나였다지 않던가요.
하지만 제가 지금 여기서 만나려는 것은 역사도 설화도 아닙니다. '우수(雨水)'도 지났는데, 봄은 대체 어디쯤 오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고백하자면 이곳은 제 단골 '봄맞이 장소'입니다. 저는 여기만큼 예쁜 봄소식을 들을 수 있는 곳도 드물다고 믿습니다. 물론 제 혼자만의 생각이지요.

제가 기다리는 춘신(春信)은 편지가 아니라 엽서로 옵니다. 이 골짜기에 사는 어린 것들이 전해줍니다. 조그만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온기어린 시간의 도착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저는 입춘만 지나면 그들의 안부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눈을 떴는지, 잠을 깼는지, 고개를 내밀었는지. 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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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저는 그들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버들강아지'. 다행히도 쉽게 마주쳤습니다. 고맙게도, 계곡 초입에서 그 앙증맞은 모습을 내보였습니다. 보자마자 반갑게 몸을 흔들었습니다. 흔든 것이 얼굴이라 해도 좋고 꼬리라 해도 좋습니다. 아무튼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제 강아지들의 인사법입니다.
사랑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지금 막 세수를 하고 나온 것 같은 소녀의 얼굴입니다. 어찌 보면 민낯이고, 어찌 보면 분을 바른 얼굴입니다. 말갛다고 할 수도 있고 보얗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비단결 피부라 해도 좋고, '벨벳' 천 같은 살결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저 쓰다듬고 보듬고 안아주고 싶습니다.

해마다 풀리지 않는 궁금증도 있습니다. "저렇게 곱고 어린 것들이 어떻게 저토록 힘차게 솟구쳐 나왔을까. 대체 무슨 힘으로?" 저것들을 보고 있자니 충남 서산의 그것들도 슬며시 떠오릅니다. '마애불'로 유명한 용현계곡의 버들강아지들입니다. 여기 못지않게 눈에 삼삼한 그들입니다.

그 녀석들은 벌써 오래전부터 시끄러울 것입니다. 거기는 여기보다 훨씬 남쪽이니까요. 진짜 강아지들처럼 목에 방울이라도 달아준다면, 그 소리가 여간 요란하지 않을 것입니다. 양평과 서산뿐이겠습니까. 버들강아지가 있는 풍경은 어디나 개학날 초등학교 교실처럼 시끄러울 것입니다.

이 예쁘고 귀여운 생명의 마스코트들을 어찌 혼자 보겠습니까. 사진을 찍어서 SNS 세상 여기저기로 띄웠습니다. 여럿이 모여서 떠드는 방마다 올리고, 이 싱거운 인사에도 반가워할 사람들을 골라서 보냈습니다. 버들강아지들이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날아가서 어른님 벗님 아우님들에게 봄을 알렸을 것입니다.

순간, 이문재 시인의 시 '농담'이 겹쳐졌습니다.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는 저 아름다운 버들강아지들과 함께 놀고 싶은 사람들 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애틋한 사랑의 시도 연달아 생각났습니다. 선조임금 때 여인 홍랑(洪娘)의 시조입니다. 하릴없이 헤어져야 하는 임,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연인에게 보낸 사랑의 정표, '묏버들'. 어쩌면 그것도 '갯버들'이었을 것만 같습니다. 저리 어여쁜 것을 혼자서 바라봐야 하는 신세가 스스로 가여워 여인은 울었겠지요.

그러나 이 여인은 하염없이 울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이내 '공유(公有)'의 방법을 생각해냅니다. 자신이 사랑하고 즐기는 것을 임께서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버들가지를 꺾어서 보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버들을 자기처럼 여기고 보아달라는 당부인 동시에, 비록 떨어져 있어도 같은 것을 바라보고 싶다는 격한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버들가지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이 몸이라 여기소서

새 싹이 나고, 새 잎이 돋고…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장면이지만 알뜰히 함께 바라보는 것. 그런 것이 사랑이란 생각이 듭니다.

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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