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그사람 - 철거반원 쇠망치로 살해한 '39년전 박흥숙 사건'을 아시나요
39년 전인 1977년 4월 20일 벌어진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을 재구성 한 것이다. 당시 언론은 무당의 아들인 박흥숙이 철거반원을 사제총으로 위협해 양손을 묶고 쇠망치로 때려 4명을 살해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당시 '무등산 타잔'이라고 불렸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면서 몸을 단련하기 위해 운동을 열심히 한 결과 무등산을 날다시피 올랐다고 한다. 독학으로 무술을 연마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의 살인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지만 무당의 아들, 사제총, 쇠망치, 무술 고수 등의 말들은 '무등산 타잔'을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게 하는 엽기적인 살인범으로 만들었고 왜 이런 참극이 빚어졌는지는 그 배경은 감췄다.
박흥숙은 타잔이라고 불렸지만 그에게는 제인도 치타도 없었다. 오히려 산짐승을 쫓기 위해 열쇠수리공으로 일하며 익힌 철공 기술로 폭발음만 나는 총을 만들어야 했다. 철거반원을 위협하는 사제총의 실체다. 무당의 아들이라고 보도됐지만 그것은 당시 덕산골이 굿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 무당골이라 불렸고 이들에게 박흥숙의 어머니가 수고비를 받고 밥을 해준 적이 있어 만들어진 말이었다. 건강을 위해 운동을 했지 싸움을 위해 무술을 연마한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법관이 돼 자신 같은 약자를 돕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었고 가족들과 함께 살기 위해 맨손으로 집을 지었던 사람이었다. 범행 후 도주 중에 만난 수상한 사람을 신고하기 위해 중앙정보부에 자수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불의한 시대가 그의 죄를 덮어주는 것은 아니다. 그 역시 최후 진술에서 "나의 죄는 백번 죽어도 사죄할 길이 없다. 나 같은 기형아가 다시는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어떤 극형을 주시더라도 달게 받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는 사형을 선고 받았고 광주교도소에서 3년 동안 수감되다 1980년 12월 24일 형이 집행됐다. 하지만 여전히 불의한 시대는 그를 단지 울분을 참지 못한 살인자로만 기억하게 하지 않는다. 개발주의와 강제철거는 무등산 타잔 이후에도 곳곳에서 비극을 낳았고 30년도 더 지난 2009년 용산에서 참사를 빚었다. 그는 최후 진술에서 이렇게 물었다. "돈 많고 부유한 사람만이 이 나라의 국민이고, 죄 없이 가난에 떨어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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