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 당시 국정원의 선거 개입 논란에 이어 국정원의 국민 휴대폰 해킹 의혹이 제기됨에 따라 세간에서는 야당과 국정원이 '3년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는 형편이다.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야당 등은 정보위를 중심으로 국정원에 대해 파상공세를 펼쳤지만 새롭게 밝혀진 사실은 많지 않은 채 언제나 의혹이 남는 것이 국정원 관련 논란의 현실이다. 정보위는 정보기관을 제대로 통제하고 있는 것일까?
정보위의 탄생은 민주화와 함께 정보기관의 공작정치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됐다. 정보위는 1994년 국회법 개정을 통해 최초로 의결됐지만 시작은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0년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제2야당인 통일민주당, 제3야당인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 논의 당시 정보위를 설치해야 한다는 요구가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최고위원의 입에서 나왔다. 당시 민주세력의 한 축을 담당했던 통일민주당측은 안전기획부(안기부)를 국회 통제에 두는 것을 골자로 하는 안기부법 개정안을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이후 여당인 민자당과 야당인 평민당은 정보위 설치에 있어서는 대체로 공감대를 보였지만 안기부 수사권의 범위와 보안업무에 대한 조정·감독권 논란 등으로 견해차를 보여 13대 국회에서 정보위 설치에 실패했다.
하지만 문민정부가 1993년 정보기관에 대한 외부 통제를 추진하며 안기부 주도아래 열렸던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폐지하고, 안기부법에 직원의 정치관여 행위 금지가 공식적으로 법에 담는 등 과감한 개혁에 나서자 정보위 설치 논의 역시 속도를 내게 된다. 여야는 끝까지 정보위 내용의 보안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 안기부에 수사권을 남겨둘 것인지, 위원 숫자는 몇명으로 정할 것인지를 논의한 끝에 1994년 6월25일 국회법을 개정해 정보위를 설치했다. 국민의 대의기관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던 정보기관에 대한 민주적 통제에 나서는 제도적 틀을 마련한 것이다.
정보위 신설에도 불구하고 국회의 정보기관 통제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윤홍중 기자회견 사건(김대중 후보가 북한으로부터 정치자금을 제공 받았다고 거짓 기자회견을 하게 한 사건), 미림팀 불법도청(여야 정치인, 재벌, 언론, 법조 등 연 인원 5000명을 대상으로 도청) 사건 등이 벌어졌다. 최근에도 SNS를 통한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이 발생하는 등 번번이 정보위는 국정원 감독에 실패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번 해킹 의혹 역시 이같은 과거 정보기관에 대한 불신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제도적으로 미미한 점 역시 많다. 가령 한국 정보위의 경우 인원이 12명이며 2년간의 활동기간을 정하고 있다. 통상 상임위원의 경우 국회규칙으로 정하고 있는데 반해 정보위의 경우에는 국회법으로 정하는 특징을 가진다. 하지만 인원이 제한적인데다 활동기간도 짧아 전문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아마저도 다른 상임위와 달리 보좌진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수시로 교체되다보니 의원 개개인의 역량에 기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미국의 경우에는 정보위 소속 직원들의 경우 정보기관 종사 경험이 있는 정보전문가들로서 FBI의 신원조사와 비밀취급 인가를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위원장 통제 아래 비밀 자료 접근권까지 보유한다. 이 때문에 한희원 동국대학교 교수는 "미국의 상하원 정보위원회는 미국 의회의 정보저장고이자 사료기록관"이라고 표현한다.
정보위가 제 역할을 못하는 배경 이면에는 대통령 직속기관이라는 정보기관의 특성과 여야로 나뉜 정치 상황 역시 작용했다. 현재 국정원은 대통령 직속기관이다 보니 국정원 관련 문제는 종종 입법부 차원의 문제가 아닌 여당과 야당의 문제로 바뀌는 경향이 있다. 국정원의 불법 사찰 의혹 등은 정권 자체를 뒤흔들 수 있는 사안이 되어, 여당은 막기에 바쁘고 야당은 의혹제기에 여념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국정원은 대통령의 의지가 없는 이상 국정원 관련 쟁점은 여야간의 정쟁으로 그치기 십상인 셈이다.
나주석 기자 gongga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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