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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알바시네]49. 일본 애니 ‘언어의 정원’에 숨은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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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언어의 정원'의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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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이 마코토의 2013년작 애니메이션 '언어의 정원(The Garden of Words)'은 내 마음을 붙드는 마력이 있다. 영화를 세번이나 반복해서 본 일은 내게 좀처럼 없는 일이다. 46분의 짧은 작품이지만, 꽃 피기도 전에 끝난 첫사랑처럼 긴 여운을 남긴다.

원제목을 보면 '말(言)의 잎사귀(葉)의 뜨락(庭)'으로 되어 있다. 언엽(言葉)이라는 말은 언어를 가리키지만, 굳이 그 사이에 소유격을 넣음으로써 말과 잎사귀를 분리한 것은 감독이 표현하고자 하는 무엇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애니메이션 '언어의 정원'의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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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잎사귀, 잎사귀의 뜨락. 이 두 개가 서로를 물고 있는 ‘코토노하노 니와(言の葉の庭)’란 타이틀은, 대학 학부시절 문학(일본문학)을 전공한 신카이 감독이 만엽집(萬葉集)이라는 고대일본의 단가집(短歌集)에 있는 두 편의 짧은 노래에 바치는 아름답고 정갈한 헌정(獻呈) 작품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만엽집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던 시절에 등장한 노래들을 중심으로 엮은 일본 최고의 가요집이라고 할 수 있다. 백제를 의지하던 일본은 나당연합군의 위세에 불안을 느껴 기타큐슈(북구주) 지방에 방어부대를 편성했는데, 이때 대개 인근지역의 민간인들이 징발되었다. 이들이 고독과 불안 속에서 시름을 잊으려 부른 노래들이 만엽집의 많은 부분을 이룬다. 이 노래들은 왜가(倭歌)라고도 부른다. 진정한 일본의 고대가요인 셈이다. 우리로 치면 고려가요와도 비슷한 민간의 서정가들이다.
애니메이션 '언어의 정원'의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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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두 편의 시 사이에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만엽집 제2513편의 시는 이렇다.

뇌신소동(雷神小動)
자운우영야(刺雲雨零耶)
군장류(君將留)

천둥이 작게 우르릉거리니
구름을 찔러 비가 떨어지게 하면
그대를 더 머무르게 할 수 있으련만

애니메이션 '언어의 정원'의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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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일곱살 유키노는 고등학교에서 고전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학교로 출근하지 않고 비오는 신주쿠 공원의 지붕이 있는 작은 쉼터에 앉아있다. 열다섯살 고등학생 타카오는 또한 무슨 일인지 학교로 등교하지 않고 비오는 신주코 공원의 지붕이 있는 작은 쉼터에 다가와 앉았다. 같은 학교에 다녔지만 둘은 서로 몰랐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사람이지만 기억해내지 못했다. 처음 만났던 그날 선생인 유키노가, 자신이 고전 교사임을 알려주기 위해 이 시를 읊는다. 타카오는 이 시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 시의 뜻을 알아가는 과정이 영화의 줄거리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저런 사건이 있고 두 사람에게 공동의 경험들이 조금씩 쌓이고 서로에 대한 신뢰와 호감이 생겨나게 된 날, 타카오는 이 시의 답가라고 할 수 있는 만엽집 제2514편을 대답으로 읊어준다.

뇌신소동(雷神小動)
수불영(雖不零)
오장류매류자(吾將留妹留者)

천둥이 작게 우르릉거리니
비록 비가 내리지 않아도
나는 더 머물 것입니다 그대가 머물러 달라고만 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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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고 감동에 사로잡혔을 대학생 신카이 마코토를 생각하면 내 가슴에 무지개가 일어난다. 신카이는 이 시를 외며, 사랑의 슬프고 아름다운 비밀을 포착해냈을 것이다. 우리로 말한다면, 갑돌이와 갑순이의 사랑, 혹은 송창식의 '한번쯤'에 나오는 그 골목남녀의 사랑이다. 갑갑이는 어떻게 되었는가. 둘이는 서로 사랑하면서도 아무도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갑돌이가 사랑한다는 말을 안해주기에 갑순이는 부모님 말씀을 따라 딴 남자에게 시집을 가버린다. 갑돌이도 화가 나서 딴 여자에게 장가를 간다. 그리고는 첫날밤에 펑펑 운다. 그 바보같은 사랑.

송창식의 노래에선 어떠했던가. 한번쯤 말을 걸겠지 하면서 앞에 서서 걷는 여인은 뒤에 따라오는 남자의 기척을 살핀다. 그런데 뒤에 따라오는 남자는 앞에 서서 가는 여자가 한번만 뒤를 돌아보기만 하면 말을 걸 태세로 계속 입을 다물고 따라가고 있다. 그러다가 골목 코스가 끝나고 여인은 자기 집 앞에서 더 이상 핑계를 찾지 못하고 들어가버린다. 뒤에 따라오던 남자는 여인이 자신에게 마음이 없는가 보다 하며 펑펑 울며 돌아선다. 왜 서로 확인도 안해보고 우리 첫사랑들은 이토록 쉽고 어리석게 돌아서고 말았던가.

애니메이션 '언어의 정원'의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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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만엽집에 나오는 두 편의 시는 바로 그 답답한 두 사람의 내면을 읊은 것이다. 천둥이 작게 우르릉거리는 건, 벌써 신호가 왔다는 의미이다. 그것이면 됐지 왜 그 다음의 실행 사인을 상대방에게 미루느냔 말이다. 첫번째 시는 아마도 여인이 읊는 시일 것이다. 천둥이 구름 엉덩이를 쑤셔 비라도 쫘악 쏟아져 내리게 하면 저 사람이 다시 발이 묶여 못가지 않을까. 그러면 하루라도 더 저 사람을 볼 수 있을텐데. 저 천둥과 운우지정에 대한 적나라한 표현은 욕망을 담은 것이기도 하리라.

그런데 그때 그 상대방 남자의 마음 속에 들어가볼 수 있는 건, 그 여인이 아니라 그의 넋두리를 듣는 우리들이다. 그 남자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지 않는가. 이미 가슴이 쿵쿵거리는 천둥소리를 확인하였으니, 이미 얘긴 끝난 게 아니던가. 비가 내리지 않은들 상관없다. 비를 핑계댈 것도 없이 당신이 나를 머물러 달라고만 하면 나는 머물 것이다. 하지만 여인은 비를 기다리고, 남자는 여인의 말을 기다린다. 그 사이에 시간은 흘러가고, 둘은 헤어지고 만다. 대학생 신카이가 감독 신카이가 되었을 때, 그는 만엽집의 이 태어나지도 못한 사랑을 저 영화 '언어의 정원'으로 그려냈다.

애니메이션 '언어의 정원'의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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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살 고교생과 스물일곱 고교교사의 사랑은 저 단가의 비련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결손가정에서 자라난 소년이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건강한 신념을 지닌 타카오는 일본인의 아름다운 원형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구두를 직접 만들겠다는 장인(匠人)의 꿈은 일본의 경제와 산업을 이룬 뿌리깊은 정신이기도 하다. 학교생활에서 억울하게 상처를 받아 마음을 닫은 유키노의 폐칩은 '비'를 핑계대는 단가의 여인의 마음을 극적으로 표현해낸 것이리라.

음식의 맛을 잃어버린 유키노는 쓴 맥주와 단 초컬릿의 자극적인 맛 밖에 느끼지 못한다. 그런 그녀는 소년이 건넨 도시락에서 입맛을 회복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구두를 만들어주기 위해 타카오는 유키오의 발을 만지며 그 사이즈를 잰다. 이 장면은 순수함과 에로틱함을 기묘하게 겹쳐놓은, 영화의 '눈'같은 것이다. 타카오는 학교에서 일어난 유키노와 관련한 사건을 알아내고 잘못된 일을 바로잡으려다 오히려 상처만 입는다. 유키노의 집에서 마침내 고백을 하지만, 유키노는 어린 그의 고백을 접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사랑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유키노의 태도 때문에 타카오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 방을 뛰쳐나간다. 두 사람의 마음과 현실이 따로 노는 상황은 만엽집과 갑갑이, 골목남녀의 형편을 재연해놓은 것에 다름 아니다.

애니메이션 '언어의 정원'의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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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오와 유키노 사이에 오간 아리송하고 어설프고 답답하고 뜬금없어 보이기도 하는 마음과 행위의 갈피들은, 이미 인간이 수천년전부터 써먹어온 사랑의 클리셰들이다. 어찌 그런 공식이나 유형들이 진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랑은 진부하고 답답하고 뻔할 뿐 아니라 거듭해서 되풀이되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현실 속에서 변주를 이룰 때, 그것은 늘 장난이 아닐만큼 실감나고 환장할 노릇이고 슬프고 고통스럽기까지 한 것이 되는 것일 뿐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세심하게 살려내고자 했던 것은, 만엽집 두 남녀의 언어 사이에 있는 풍경들일 것이다. 만엽집이란 말이 만개의 잎사귀를 모은 것이란 뜻이니, 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무의 1만개의 '혀'들이 부르는 아름다운 숲의 노래이다. 그 1만개의 혀들이 살랑거리는 숲이 '언어의 잎사귀의 뜨락'이다.

애니메이션 '언어의 정원'의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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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냈던가. 그는 빛의 연금술사라고 불린다. 빛이 자아내는 다채롭게 섬세한 숲과 도시의 풍경들을 이토록 아름답고 황홀하게 그려낸 애니메이션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고 무지개가 뜨고 햇살이 드는 장면들을 도저히 잊을 수 없게 그려낸 그 공로만으로도 이 감독은 찬사를 받을만하다. 아마도 만엽집의 시를 영상언어로 풀어낸 절창이 아닐까 한다. 일본의 단가 두 편의 감동을 곱게도 누벼넣은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이것이야 말로 인문학의 힘이 아니던가.

이상국 편집부장·디지털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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