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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논리다] 누가 ‘은ㆍ는’ ‘이ㆍ가’를 모르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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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백우진 기자] “주어 뒤에 ‘은ㆍ는’을 붙일 것인지 ‘이ㆍ가’를 붙일 것인지는 정말 어려운 문제이지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선택은 여러분의 한국어 감수성에 맡기면 된다. 한 가지 물렁물렁한 지침이 있다면 같은 조사를 연속해서는 쓰지 않는 게 좋다.”

책 ‘고종석의 문장’ 중 한 대목의 메시지다.
보완이 필요한 대목이다. ‘이ㆍ가’는 문장의 초점을 주어에 맞출 때 붙인다. 이는 누구ㆍ무엇ㆍ어디 등을 묻는 의문문에서 ‘이ㆍ가’를 쓰는 데서도 확인된다. 책 제목에서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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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무엇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가?
▶어디가 아프니?

각 문장에서 ‘이ㆍ가’를 ‘은ㆍ는’으로 바꾸면 어떻게 되나.
▷누구는 내 머리에 똥 쌌어?
▷무엇은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가?
▷어디는 아프니?

의문문 형식인데 의문문이 아닌, 무슨 말을 하는지가 흐릿한 문장이다. (이 뒷 절(節)도 적절한 예가 된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흐릿한 문장’이라고 하면 뜻이 모호해진다.)

반면 ‘은ㆍ는’은 주어의 행위를 서술하는 데 주안점을 둘 때 붙인다. ‘나는 세계일주로 경제를 배웠다’를 ‘내가 세계일주로 경제를 배웠다’와 비교해보면 차이를 알 수 있다.

‘은ㆍ는’과 ‘이ㆍ가’를 쓰는 세부 규칙은 책 '국어토씨연구(김승곤ㆍ서광학술자료사)'에 상세하게 나온다.

응용문제를 하나 살펴보자.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 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 싶었다. 뭍으로 건너온 새들이 저무는 섬으로 돌아갈 때, 물 위에 깔리는 노을은 수평선 쪽으로 가서 소멸했다.”

김훈 소설 ‘칼의 노래’의 첫 대목이다. 소설가는 ‘꽃이 피었다’로 소설의 첫 문장을 삼을지 ‘꽃은 피었다’로 할지를 놓고 며칠 고민했다고 한다.

김훈은 산문집 ‘바다의 기별’에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꽃이 피었다’는 꽃이 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보여주는 언어입니다.”

소설가의 선택은 적절했으나 설명은 정확하지 않다.

화자(話者)가 첫 문장에서 듣는 사람의 관심을 어디로 유도할 때에는, 문장에서도 그 대상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래서 조사로 ‘은ㆍ는’이 아니라 ‘이ㆍ가’를 써야 한다.

이에 따라 거의 모든 옛날 이야기에서 첫 문장의 조사로 ‘이ㆍ가’를 붙인다.

▶옛날 옛날에 꼬부랑 할머니가 살고 있었어요.
▶옛날 옛날에 백설공주가….
▶옛날 옛적에 효녀 심청이가….

이와 달리 첫 문장의 주어에 ‘은ㆍ는’을 조사로 쓴 사례를 알려주면 기자가 적절히 사례(謝禮)하겠다.

‘이ㆍ가’가 아니라 ‘은ㆍ는’을 첫 문장에서 쓰는 건, 다른 주어를 염두에 둠을 전제로 한다.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는 꽃은 피었지만 다른 무언가는 피지 못했거나 시들었거나 졌거나, 하여간 피었다와 비교가 되는 어떤 상태라는 사실을 함축한다.

만약 소설가가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고 첫 문장을 시작했다면, 그는 둘째 문장에서는 독자의 시선을 꽃이 아닌 다른 대상으로 옮겨야 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이 풀어가는 식이다.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 섬 마을 집은 곳곳이 불타 무너졌다.’

화자가 자신의 시선을 꽃에 맞추고 그 초점을 숲으로 넓히고 숲에 저녁노을이 비쳤다는 정경을 추가한 뒤 다시 줌아웃해 섬으로 시야를 넓히는 위와 같은 순서의 서술에서 첫 문장은 ‘꽃이 피었다’가 맞다.
백우진 디지털뉴스룸 선임기자

백우진 디지털뉴스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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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우진 기자 cobalt10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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