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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훈의 X-파일]“고마워요, 사토!”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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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사토[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G.G 사토[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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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29일 세이부돔을 찾은 기자들의 눈은 한 선수에게 쏠렸다. 시즌 21호 홈런을 치며 세이부의 승리를 견인한 G.G 사토였다. 그런데 이날의 취재 열기는 단순히 홈런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전날 발표된 2008 베이징올림픽 최종명단의 영향 덕이 더 컸다. 사토는 24명 가운데 한 명으로 당당하게 선발됐다. 3천만 엔(약 4억 3700만 원)으로 연봉이 대표팀에서 가장 적었던 그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도 순위 경쟁으로 치열하던 소속팀을 걱정했다.

“몸은 베이징으로 향하지만 혼은 세이부돔에 놓고 가겠다. 평생 잊어버릴 수 없는 플레이를 하고 돌아오겠다.”
당찬 각오는 베이징에서 현실이 됐다. 사토는 한국과 일본 야구팬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안겼다. ‘고마워요 사토!’ 사건이다.

그라운드의 ‘켄시로’를 꿈꾼 말라깽이

사토는 1978년 8월 3일 지바 현 이치카와 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사토 다카히토(佐藤 隆彦). 하지만 어린 시절 친구, 선배들로부터 ‘늙은이’로 불렸다. 노안의 얼굴 때문이었다. 사토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놀림을 즐겼다. 2004년 세이부에 입단해 이름을 G.G 사토로 등록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G.G는 ‘지지쿠사이(ジジくさい)’라는 일본어에서 따왔다. ‘노인네 같다’라는 뜻이다.

고교시절 사토는 주로 3루수와 유격수를 맡았는데 강견에 공을 맞추는 재능이 탁월하다고 평가받았다. 호평으로 일색이었던 건 아니다. 거의 매 경기에서 수비 불안을 노출했다. 더구나 모교인 지바 토인학원고는 재학 기간 한 번도 일본고교야구 하계전국대회(고시엔) 본선에 오르지 못했다. 프로구단 스카우트에게 기량을 알릴 기회가 매우 적었던 셈이다.
사토의 실력을 알아보는 스카우트도 있었다. 엘리트만 진학한다는 도쿄 6대학리그 소속의 호세이 대학이다. 이들은 사토가 수비 불안을 극복할 강한 어깨, 큰 키(184cm) 등 좋은 체격조건을 갖췄다고 여겼다. 1루수나 외야수로 뛸 경우 중심타선을 책임질 재목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대학 진학 이후 사토는 벤치를 지키는 날이 더 많았다. 수비를 보완했지만 대학 관계자들이 기대한 장타를 보여주지 못했다. 특히 마른 체격으로 타구에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는다고 자주 지적받았다. 좁아진 팀 내 입지로 사토는 프로구단의 지명은커녕 대학 4년 내내 주전 자리도 꿰차지 못하고 졸업장을 받을 위기에 놓였다. 이에 그는 1999년 봄 결단을 내렸다. 웨이팅 트레이닝에 매진, 파워 배팅을 실현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G.G 사토[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G.G 사토[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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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토는 이전부터 파워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어린 시절 이상형이 만화 ‘북두의 권’의 주인공 켄시로였단 점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하며 자신도 켄시로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185cm, 100kg의 체격에 울퉁불퉁한 근육을 목표로 삼았다. 몸집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커갔다. 3학년 봄 79kg에 불과했던 몸무게는 6개월 뒤 104kg이 됐다. 불어난 몸은 보디빌더와 같았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얼굴을 제외한 모든 것이 켄시로와 똑같아졌다.

호세이 대학 야구부 감독은 이런 사토의 노력을 높이 샀다. 이내 그해 10월 열린 도쿄 6대학리그 추계대회에서 그를 주전으로 기용했다. 맡게 된 포지션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 야구 아시아지역예선 일본대표로 차출된 아베 마사히로(세이부 라이온즈·통산 863경기 출전)가 담당하던 유격수. 도쿄 6대학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세 자릿수 몸무게의 유격수가 선발 출전하는 순간이었다.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기대했던 장타는 여전히 가뭄에 시달렸다. 지나치게 비대해진 몸 탓이었다. 유연성 등이 떨어져 벤치프레스를 200kg나 들어 올릴 정도의 엄청난 힘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 사토가 대학 4년 동안 때린 홈런은 단 한 개였다.

일본 프로야구 최초의 ‘역수입’ 선수

예상대로였다. 2000년 신인드래프트애서 사토를 지명하는 프로구단은 한 곳도 없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대학 졸업 직후인 2001년 미국으로 건너가 필라델피아 필리즈 산하 로우 싱글A 팀 바타비아 먹독스에 입단했다. 외국인으로 분류된 사토는 이전부터 맡았던 내야수를 원했다. 그러나 형편없는 수비에 코칭스태프는 곧 불가 판정을 내렸다. 대신 강한 어깨를 높게 평가, 포수 전향을 권유했다. 사토는 마스크를 쓰고 충분한 가능성을 선보였다. 포수로 출전한 31경기에서 3개의 패스트볼만을 허용했고 눈앞에서 26번의 도루 시도가 벌어졌지만 이 가운데 8번(31%)을 잡아냈다.

재능을 뽐낸 건 수비뿐만이 아니었다. 사토는 타격에서도 무난한 성적을 남겼다. 37경기에 출전해 타율 2할6푼1리 OPS(출루율+장타율) 0.760을 기록했다. 로우 싱글A 승격 이후 가진 20경기에서는 타율 3할6리 OPS 0.881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야구에 적응하는 듯했던 그는 돌연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포수 수비에 대한 부담, 영어 구사의 어려움에 따른 스트레스였다.

공항에 발을 내딛은 사토는 다시는 야구를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배트를 내려놓자마자 바로 새로운 일자리를 구했다. 건장한 체격을 앞세워 일본의 대표적인 연예기획사 쟈니스 프로덕션의 보디가드로 취업했다. 회사 관계자들은 운동선수 특유의 성실함에 유머감각을 발휘하는 사토에게 호감을 보였다. 그가 계속 일해주길 희망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토는 다시 배트를 손에 쥐었다. 쟈니스 소속 연예인의 시구 경호를 위해 지바마린스타디움을 방문한 이후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그라운드라는 걸 깨달았다. 이내 보디가드로 일하며 틈이 생기는 대로 프로구단에서 개최하는 입단테스트에 참가했다.

G.G 사토를 프로무대로 불러들인 이토 쓰토무 두산 수석코치(사진=정재훈 기자)

G.G 사토를 프로무대로 불러들인 이토 쓰토무 두산 수석코치(사진=정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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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수마스크를 쓰고 테스트에 참가한 사토를 눈여겨 본 이가 있었다. 당시 세이부에서 플레잉코치로 뛰었던 이토 쓰토무(현 두산 수석코치)다. 이토 코치는 합격 대신 더 큰 선물을 제공했다. 사토를 따로 만나 “내년 신인드래프트에서 너를 지명하도록 구단에 강력하게 요청하겠다”라고 말했다. 한껏 고무된 사토는 바로 쟈니스 프로덕션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바로 미국으로 날아가 잃어버린 감각을 회복하는데 주력했다.

2003년 필라델피아 구단은 1년 만에 돌아온 사토를 한 단계 높은 리그로 보냈다. 싱글A 팀인 레이크우드 블루 클라우즈였다. 포수로 합류한 그의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96경기에서 타율 2할4푼7리 OPS 0.727을 기록했다. 하지만 포수로 나선 49경기에서 0.982이라는 높은 필딩 확률을 선보였다. 그 사이 감독 취임을 앞뒀던 이토 코치는 약속을 실행으로 옮겼다. 그해 11월 열린 신인드래프트에서 7순위로 사토의 이름을 호명했다.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마이너리그에서 프로무대를 밟은 사토가 일본프로야구 최초로 ‘역수입’돼 신인 지명을 받는 순간이었다.

세 가지 글러브를 낀 남자

이토 감독은 사토를 포수가 아닌 1루수와 지명타자로 내보냈다. 주전포수로 호소카와 도오루(소프트뱅크 호크스)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프링캠프에서 주전경쟁에 임하는 각오를 밝혀달라는 질문에 사토는 “죽이는 게 미적지근하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라며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괜한 호기는 아니었다. 2004년 8월 1군 선수단에 합류한 사토는 연일 맹타를 휘둘렀다. 그 덕에 8월 25일 3번 지명타자로 선발 출전하는 감격을 누렸고 이후 45경기에 출장해 타율 2할9푼8리 3홈런 OPS 0.840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듬해 그는 주전 자리를 보장받지 못했다. 주전 1루수 알렉스 카브레라와 다른 외국인 거포의 효과적인 활용을 노린 세이부 구단이 우익수로 포지션을 변경해줄 것을 요청한 까닭이다.

외야수비 적응으로 2군에서 보내는 시간은 예상보다 길어졌다. 타율 3할7푼2리 13홈런의 맹타를 뽐냈지만 8월 20일이 되어서야 1군에 합류했다. 사토는 선발 우익수로 복귀전을 치렀다. 하지만 미숙한 외야수비에 의욕이 저하된 탓인지 이후 경기에서 타율 2할1푼4리 2홈런을 때리는데 머물렀다.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듬해인 2006년 스프링캠프에서 그는 세 가지 종류의 글러브를 들고 다녔다. 포수 미트, 1루수 미트, 외야수 글러브였다. 이토 감독은 “스프링캠프에서 가장 성장한 선수”라며 사토를 격려했다. 하지만 세 가지 포지션을 오고가는 사이 리듬은 엉망진창이 됐고 그해 45경기에 출전해 타율 2할4푼8리 4홈런 OPS 0.659를 남기는데 그쳤다. 포수, 1루수, 우익수 모두에서 노출한 불안한 수비와 이토 감독의 원칙 없는 기용이 불러일으킨 처참한 결과였다. 시즌 뒤 사토는 우회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홈 플레이트 뒤에서 수비를 하다 내야로 옮겼고 이번에는 외야로 이동했다. 점점 집(홈 플레이트)과 멀어지고 있다. 외야 관중석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2008 베이징올림픽 중계 당시 "고마워요, 사토"라는 말로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허구연 MBC 야구 해설위원(사진=정재훈 기자)

2008 베이징올림픽 중계 당시 "고마워요, 사토"라는 말로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허구연 MBC 야구 해설위원(사진=정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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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파동포’로 입지 다지다

사토는 2007년 불안정한 팀 내 입지를 실력으로 극복했다. 시범경기에서 홈런 5개를 때려내며 선발 우익수 자리를 꿰찼다. 그는 개막전과 다음 경기에서 연속 홈런을 치며 시범경기에서의 맹타가 우연이 아님을 증명했다. 입단 이후 3년 동안 고생한 사토에게 팬들은 뜨거운 성원을 보냈다. 4월 28일 지바롯데 마린스와의 홈경기에서 수훈선수로 선정된 그는 이에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팬을 사랑하고 팬에게 사랑받는 선수가 되고 싶다. 올 시즌 목표는 ‘사랑의 파동포 사토’다.”

‘파동포’는 인기 애니메이션 ‘우주전함 야마토’에서 야마토함의 가장 강력한 공격무기다.

사토는 팬들과의 약속을 차분하게 실천해나갔다. 하지만 세이부의 성적은 에이스 마쓰자카 다이스케(보스턴 레드삭스)의 포스팅 이적과 주전선수들의 줄 부상으로 리그 하위권을 맴돌았다. 내리막 현상은 7월 들어 더 심해졌다. 카브레라의 전력 이탈에 중심타선을 지키던 와다 가즈히로(주니치 드래건스), 에도 아키라(요미우리 자이언츠 코치)마저 집단 슬럼프를 겪은 탓이 컸다. 진퇴양난에 빠진 이토 감독은 결국 7월 11일 사토를 4번 타자로 기용했다. 소감을 묻는 질문에 사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귀는 여자에게 처음으로 ‘당신이랑 사귀어서 정말 다행이야’라는 말을 들은 것 같다. 책임감이 생겼다.”

사토의 4번 자리 입성은 ‘3일 천하’로 마무리됐다. 카브레라의 부상 회복과 동시에 자리에서 밀려났다. 한 달여 뒤인 8월 30일 지바롯데전에서 사토는 다시 4번에 복귀했다. 이 경기에서 그는 11회말 상대 마무리 고바야시 마사히데를 상대로 1루 방면 끝내기 내야안타를 때려냈다. 이어진 수훈선수 인터뷰에서 사토는 “기적이란 말은 일어나기 위해 있는 것”이라며 우쭐거렸다. 이어 큰 목소리로 “도코로자와의 기적! 미라클 라이온즈! 기모티이!(‘기분이 좋다’는 뜻의 일본어로 ‘기모치’가 정확한 발음)”라고 외쳤다. 이후 ‘기모티’라는 말은 세이부 팬들 사이에서 한동안 유행어로 회자됐다. 사토는 이에 걸맞게 타율 2할8푼 25홈런 69타점 OPS 0.861를 남기며 세이부의 중심타자로 자리매김했다. 고무적인 성과는 하나 더 있었다. 우익수 수비다. 실책을 한 번도 저지르지 않으며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던 수비력 논란에 마침표를 찍었다.

전국구 스타, 올림픽 실책에 무너지다

오프시즌 연봉협상 테이블에서 사토와 세이부 구단은 적잖은 진통을 겪었다. 사토는 4천만 엔(약 5억 8천 8백만 원)을 요구했고 구단은 3천만 엔을 고수했다. 스프링캠프 개막일인 2월 1일까지도 의견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결국 갈등은 일본프로야구 사무국으로까지 넘어갔다. 니혼햄 파이터스 소속이던 시모야나기 츠요시(라쿠텐 골든이글스) 이후 퍼시픽리그에서 8년 만에 벌어진 연봉조정 신청이었다. 사무국은 고심 끝에 세이부 구단의 손을 들어줬다. 훗날 사토는 사인을 미뤘던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 마이너리그 시절 구단으로부터 납득할만한 설명을 듣기 전까지 연봉재계약에 도장을 찍지 않는 선수들을 여럿 보았다. 얼마를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구단에서 이 정도의 연봉을 책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먼저 듣고 싶었다.”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G.G 사토를 좌익수로 기용한 호시노 센이치 감독[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G.G 사토를 좌익수로 기용한 호시노 센이치 감독[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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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는 연봉협상에 생긴 갈등을 그라운드로 가져오지 않았다. 시즌 개막 때부터 연일 장타를 쏘아 올렸다. 4월 10일부터 16일까지 일본 프로야구 역대 타이인 6경기 연속 2루타를 때려냈고 5월 타율 3할8푼9리 9홈런 23타점을 남기며 월간 최우수선수(MVP)를 수상했다. 타격 3관왕 가능성을 묻은 취재진의 질문에 사토는 “서른 살이 넘은 독신여성에게 ‘결혼 안 해?’라고 묻는 것만큼이나 예민한 질문”이라며 즉답을 피했다. 하지만 2008 베이징올림픽 발탁 가능성에 대해서는 “불러만 주신다면 영광”이라고 답했다.

빼어난 성적에 더 해진 특유 유머감각은 사토를 순식간에 전국구스타로 올려놓았다. 그해 올스타 투표에서 그는 양대 리그 최다인 36만 7837표를 획득했다. 인기는 그라운드 안팎을 가리지 않았다. 이어진 선수투표에서도 지지는 476표로 가장 많았다.

일본 야구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호시노 센이치 감독(라쿠텐 골든이글스)이 명단에 사토의 이름을 올린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는 베이징 행 비행기에 오르며 “사토를 주전 좌익수로 기용하겠다”라고 밝혔다. 앞서 어떤 자리를 맡아도 괜찮다는 의사를 내비친 사토. 하지만 그는 프로에서 좌익수로 출전한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 한국전에서의 불안한 수비는 충분히 예견된 결과였다.

사토는 한국과의 준결승전에서 2-0으로 앞선 4회 수비에서 선두타자 이용규(KIA 타이거즈)의 좌전안타 타구를 뒤로 빠트려 2루까지 진루를 허용했다. 4-2로 뒤진 8회 2사 1루에서는 고영민(두산 베어스)의 평범한 뜬공을 낙구해 5점째를 허용했다. 실책 퍼레이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미국과의 3-4위전에서도 낙구 에러를 범하며 3점을 헌납, 상대 팬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8월 24일 나리타공항을 통해 귀국한 선수단에서 쾌활한 모습의 사토는 발견되지 않았다. 세이부 구단 사장까지 마중을 나가 위로를 건넸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세이부 구단은 이내 사토와의 면담 자리를 마련, 멘탈 카운슬러에게 상담치료를 받을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와타나베 히사노부 감독의 저지로 이는 없던 일이 됐다. 결국 사토는 오른 다리 피로골절을 이유로 9월 16일 1군 명단에서 말소됐다. 세이부의 저팬시리즈 우승 때도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탈리아로 날아간 이유

사토는 2008 베이징올림픽의 충격을 딛고 이듬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4월 27일 얻은 딸이 터닝 포인트가 됐다. 이후 그는 빠른 속도로 컨디션을 회복했고 그해 9월 타율 4할 9홈런을 기록하며 팀 동료 호아시 가즈유키(소프트뱅크)와 함께 월간 MVP에 선정됐다. 전반기 2할6푼에 그쳤던 타율도 2할9푼1리로 끌어올렸다. 홈런과 타점은 각각 25개와 83점이었다.

G.G 사토[사진=포르티튜도 볼로냐 홈페이지]

G.G 사토[사진=포르티튜도 볼로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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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10년 베이징에서의 악몽은 되살아났다. 좌익수로 수비 위치를 옮기며 다시 한 번 컨디션 난조를 겪었다. 시범경기에서 수위타자에 등극하며 물오른 타격감을 뽐냈지만 정규시즌에서 타율과 OPS는 각각 2할4리와 0.596에 머물렀다. 결국 사토는 7월 2일 1군 전력에서 제외됐고 이를 끝으로 1군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다. 여기에는 와타나베 감독의 방침도 적잖게 영향을 미쳤다. “젊은 선수들을 최우선으로 기용하겠다”라고 거듭 밝혀 재기를 향한 사토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의지를 상실한 그는 지난해 한 차례도 1군 무대를 밟지 못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9일 구단으로부터 방출 통보를 전달받았다.

사토의 이름이 야구팬들의 기억에서 사려졌을 즈음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이탈리아 프로야구리그(IBL·Italia Baseball Leage) 볼로냐 포르티튜도 1953에 입단했다는 뉴스였다. 1944년 야구가 보급된 이탈리아는 1948년부터 세미프로리그 세리에A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 구조는 1부 리그 A1, 2부 리그 A2 그리고 하부 리그인 세리에 B, 세리에 C1, C2 등으로 나뉘는데 이탈리아 야구협회는 2010년 1부 리그 세리에 A1을 프로리그인 IBL로 개명했다. 4월부터 시작되는 시즌에서 8개 구단은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42경기씩을 소화한다. 각 팀들은 외국인 선수를 최대 3명까지 보유할 수 있다.

12주차까지 진행된 리그에서 볼로냐는 26승 10패로 2위를 달린다. 사토는 36경기에 모두 출전해 타율 3할5푼 1홈런 18타점 OPS 0.904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왜 돌연 이탈리아로 넘어간 것일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보디빌더의 국적이 이탈리아였다. 그래서인지 이전부터 호감이 있었다. 이탈리아에 프로리그가 있다는 걸 알게 된 뒤 비행기에 오르기로 결심했다.”

사토가 일본에서 다시 뛰는 모습은 사실상 보기 어려울 전망이다. 하지만 그의 야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성훈 해외야구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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