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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한국유사] 서경 반란군 반년 포위한 김부식 "때가 됐다, 土山을 짓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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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묘청의 난과 진압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교수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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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卿)은 문무(文武)의 재능으로 장상(將相)의 임무를 맡아 관용으로 군사들의 마음을 얻었고, 깊은 기교와 신묘한 무기로 무릇 제어하는 기술은 이미 가슴 속에 정하여 두었다. 처음에는 성(城)과 목책(木柵)을 쌓아 사졸(士卒)을 쉬게 하였고, 끝내는 토산(土山)을 일으켜 적의 성채(城寨)를 압박하니, 마침내 역적의 무리로 하여금 형세만 보고도 스스로 궤멸되어 속수무책으로 나와 항복하게 하였다.”


고려 국왕 인종(仁宗)은 서경(西京·평양) 반란 진압에 성공한 김부식에게 벼슬을 내렸다.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 검교태보(檢校太保) 수태위(守太尉) 문하시중(門下侍中) 판상서리부사(判尙書吏部事) 감수국사(監修國史) 상주국(上柱國) 겸 태자태보(太子太保)다.

인종은 김부식이 개선해 돌아오자 다시 좋은 집 한 채를 하사했다. 그야말로 신하에 대한 최고의 포상이었다. 그만큼 서경 반란이 고려 왕조에 위협적이었던 정황을 방증한다.


1135년 정월, 묘청이 서경에서 조광·유참 등과 함께 고려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이른바 묘청의 난이다. 묘청은 자비령을 차단하고 서북면(西北面)의 군사들을 서경으로 집결시켰다. 국호는 대위(大爲)로, 연호는 천개(天開)로 정해 고려 왕조를 전면 부정했다.


인종은 김부식을 원수로 삼아 진압군 편성에 나섰다. 김부식이 중군, 김부의가 좌군, 이주연이 우군을 인솔해 3군 체제로 북상하기 시작했다.

김부식은 평주(平州)를 거쳐 성주(成州)에 도착했다. 주변 여러 성들에 보낸 격문에서 묘청의 반란을 주지시키고 서경에도 사람을 보내 타일렀다. 서경 반란군에 협조할 수 있는 양계(兩界) 지역부터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진압군은 서경을 우회해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가 위치한 안주(安州)에 도착했다. 양계 지역이 동요해 진압군에 우호적으로 돌아서자 반란군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결국 평주판관(判官) 김순부가 국왕의 조서까지 들고 서경으로 입성하자 서경 사람들은 묘청·유참 등을 잡아 베었다. 윤첨·조창언 등은 죄를 청하기에 이르렀다.

김부식(왼쪽)과 묘청

김부식(왼쪽)과 묘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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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5년 고려 인종 때
서경천도·금국정벌론 주장하던 묘청
개경 귀족의 반대로 무산되자 반기
국호 정하고 서경으로 군사 모아

개경에 도착한 윤첨은 오래지 않아 하옥되고 묘청은 저잣거리에서 효수됐다. 서경에 남아 있던 조광은 자기도 처벌받을 것이라 직감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인종이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김부를 윤첨과 함께 서경으로 보내 조서를 반포케 했다.


하지만 김부는 서경 세력을 겁주고 위협했지 위로하거나 달래지 않았다. 결국 서경 사람들은 두려움·분노로 김부와 함께 시종한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성문까지 걸어 잠갔다. 김부식이 이덕경을 보내 타일렀으나 그도 살해당하고 말았다. 다시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인종은 내시지후(內寺祗候) 정습명 등에게 서경 서남쪽 해도(海島)로 가서 궁수(弓手)와 수수(水手) 4600명을 모집하게 했다. 선박 140척으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서경성 일대 적선에 대비케 하려는 의도였다. 동시에 상장군(上將軍) 이녹천으로 하여금 서해 수군 선박 50척을 이끌고 참여케 했다.


정습명의 선단과 이녹천의 선단은 철도(鐵島)에서 합류했다. 황해도 황주군에 자리 잡은 철도는 대동강과 재령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섬으로 대동강 수로의 경제적·군사적 요충지였다.


대동강 하구에서 평양까지는 조수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따라서 밀물과 썰물의 움직임을 잘 파악해야 한다. 하지만 이녹천은 정습명의 만류에도 썰물 때 선단을 출발시켰다. 진압군의 선단은 서경성에 도착하기도 전 얕은 곳에서 좌초되고 말았다. 이때 반란군은 작은 배 10여척의 기름 잔뜩 먹은 짚에 불을 붙여 물길 흐름 따라 흘려보냈다.


진압군 선단에 불이 옮겨붙기 시작했다. 강변에 매복 중이던 반란군 수백 명이 쇠뇌를 발사했다. 선단에 적재한 병장기가 모두 불탔다. 승선한 병사 태반은 익사했다. 진압군의 실책으로 반란군의 사기가 크게 올라갔다. 반란군은 진압군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김부식은 "서경이 북으로 산과 언덕을 등지고 삼면은 물로 막혔으며 성이 또 높고 험하여 서둘러 함락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서경성을 포위하고 장기전에 돌입하기로 결심했다. 중군은 천덕부(川德部)에, 좌군은 서경성 남쪽 흥복사(興福寺)에, 우군은 서경성 북쪽 중흥사(中興寺) 서쪽에 주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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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 정부군 이끌고 진압 나서
주변지역 차례로 장악하자 반란군 동요
묘청 등은 서경사람들에 의해 죽었지만
처벌 무서웠던 조광 등이 반란 지속
정부군 위협 계속되자 서경 사람들도 동참

대동강 도하 지점에 후군(後軍)을, 중흥사 동쪽에 전군(前軍)을 추가로 편성·배치했다. 이로써 서경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장기전에 대비했다.


서경성이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 수차례 공격을 시도했지만 성문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서경성을 포위한 지 어느덧 반년이 훌쩍 넘어버렸다. 비축 식량은 줄고 있었다. 10월이 되자 반란군은 성내의 노약자와 부녀자를 성 밖으로 방출했다. 진압군은 때가 됐음을 직감했다.


진압군은 11월부터 공성을 위한 토산(土山) 구축에 나섰다. 위치는 서경성 서남쪽으로 선정됐다. 당시 서경성 외곽 나성(羅城)은 거의 무너져 서경성 중성(重城)이 반란군과 진압군의 대치선이었다.


진압군은 병력 2만3200명과 승도(僧徒) 550명으로 흙·돌·목재의 토산을 구축했다. 높이 8장(丈), 길이 70여장, 너비 18장이었다. 1장을 약 3m로 계산하면 높이 24m, 길이 210m, 너비 54m의 규모다. 서경성과 거리는 몇 장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토산은 이듬해 2월 거의 완성됐다.


진압군의 공성 준비도 이뤘졌다. 진압군은 조언이 제작한 거대 발석기(發石機·투석기)를 토산 위에 설치했다. '수백근(斤)'짜리 돌을 서경성으로 날려 보내자 성루와 성벽이 파괴됐다. 수레바퀴만한 화구(火球)는 성문과 행랑 등을 불태웠다.


서경성 성문과 성벽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진압군의 성내 진입이 가능해졌다. 토산과 그 위에 설치된 대형 발석기가 공성전을 승리로 이끈 것이다.


진압군이 토산 위에 설치한 발석기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였는지 기록돼 있지 않다. 하지만 중국 측 자료들에 따르면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송(宋) 시대에 발석기를 '포(砲)'로, '고려사'에는 '포기(砲機)'로 표기돼 있다. 동일한 공성 무기임을 알 수 있다.

북송(北宋)의 군사 서적 '무경총요(武經摠要)'에 가장 큰 것이 칠초포(七梢砲)로 기록돼 있다. 포초장(砲梢丈) 28척(尺), 예삭(曳索) 125근(根), 포사수(抛射手) 250인, 사정 50보(步), 석탄중(石彈重) 90~100근이다. 포신 약 8.4m, 당김 줄 125개, 당기는 인원 250명이었다.


당시 1보는 5척이었으니 사정거리 약 75m, 돌의 무게 약 60㎏이었다. 진압군이 토산 위에 설치한 것은 석탄 '수백근'을 날린다고 했으니 칠초포와 유사하거나 더 대형일 수도 있다.

서경성에서 성문을 걸어잠근 채 반년 넘게 저항하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김부식은 토산 구축에 나섰다. 진압군 2만3000명과 승도 550명이 동원돼 약 3개월에 걸쳐 완성된 토산은 높이 24m, 길이 210m, 너비 54m 규모였다. 사진은 영화 '안시성'의 한 장면이다. 고구려를 침략한 당 태종이 안시성을 함락하기 위해 토산 전략을 펼쳤지만 실패로 끝나고 안시성을 지키던 양만춘 장군은 대승을 거뒀다. 김부식은 당 태종도 실패했던 토산 전략으로 서경 반란군을 진압한 것이다.

서경성에서 성문을 걸어잠근 채 반년 넘게 저항하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김부식은 토산 구축에 나섰다. 진압군 2만3000명과 승도 550명이 동원돼 약 3개월에 걸쳐 완성된 토산은 높이 24m, 길이 210m, 너비 54m 규모였다. 사진은 영화 '안시성'의 한 장면이다. 고구려를 침략한 당 태종이 안시성을 함락하기 위해 토산 전략을 펼쳤지만 실패로 끝나고 안시성을 지키던 양만춘 장군은 대승을 거뒀다. 김부식은 당 태종도 실패했던 토산 전략으로 서경 반란군을 진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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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으로 산과 언덕 등진 서경성
단기간에 함락 어렵다 판단한 김부식
완전히 포위한채 수차례 공격
반년 지날무렵 공성 위한 토산 구축 시작
거대 발석기도 설치해 수백근 돌 날려
결국 공성전 승리 이끌고 반란군 진압

토산 쌓기는 고대부터 시행됐던 공성 방법이다. 645년 당(唐) 태종(太宗)도 고구려 안시성 공격 당시 토산을 구축해 공성에 활용하고자 했다. 60일 동안 연 인원 50만명을 동원해 완성했다. 토산에서 안시성을 굽어볼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토산이 붕괴돼 성벽을 밀어 무너뜨렸다. 그 틈에 고구려군이 토산을 탈취해 방어했다. 당군은 토산을 탈환하기 위해 3일 동안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안시성 공략과 고구려 원정을 중단하고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당 태종이 실패한 토산 공략법을 김부식은 성공시켰다. 사실 토산 공략법을 처음 제시한 것은 윤관의 아들 윤언이다. 발석기 공격으로 서경성이 허술해지자 총공격을 건의한 것도 그다.


하지만 군사에 관한 최종 결정권자는 김부식이었다. 군사적 실패에 대한 책임도 그가 져야 했다. 김부식은 서경성 장기 포위 전술로 반란군을 고립시켰다. 반란군 사이에 식량난이 발생하자 토산 구축과 발석기 제작으로 공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김부식은 장장 2년이나 끌어온 서경 반란을 진압하고 개경으로 개선했다. 김부식에 대한 인종의 신뢰는 무한했다. 그 결과 김부식은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 편찬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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