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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의 프레임] 사막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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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의 프레임] 사막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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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같은 종인데도 척박한 땅에서 자란 나무는 비옥한 땅에서 자라는 나무에 비해 뻗은 가지의 수도 적고 잎도 덜 피우고 더 두껍다. 사막에서 자란 나무는 더하다. 잎조차 버리고 자기의 뿌리와 가지를 더 보호하는 데 몰두하고 잎 대신에 가시를 키우기도 한다.


난 사막의 나무처럼 살았다. 내가 키울 수 있는 잎을 최소화해 나의 두께를 두껍게 만들며 살아왔다. 햇볕을 찾아 가지의 방향을 틀고 틀어 다른 모양을 한 나무처럼.

시골에서 올라와 서울 청담동 패션 바닥에 발을 들여놓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바람 부는 날에는 압구정에 간다'라는 시집의 제목이 유행할 즈음 어시스턴트 면접을 보러 처음 압구정이란 델 왔고, 나와는 전혀 다른 화려하기 그지없는 군상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3시간 동안 석고상처럼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면접 시간은 고작 5분. 맥이 빠졌다.


이 바닥과 안 어울리지 않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불안하고 불편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다음이 더 문제였다. 들어보지도, 겪어보지도 못한 신세계….


내가 그때까지 배우고 경험한 세계관? 인생관? 아니, 거창하게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상식부터 달라도 너무 달랐고 언어조차 다르게 들렸다. 전문 용어는 거의 영어나 일본어 등 외래어였다. 지금은 알아도 쓰지 말자는 분위기이지만 그땐 멋으로 많이 쓰던 '간지나게'라는 말이 뭔 뜻인지 알 수도 없었고.

지금처럼 인터넷 시대도 아닌지라 물어볼 수밖에 없었는데 돌아오는 건 '그런 것도 몰라?'라는 주변의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그래서 난 내 어시들에게 항상 말한다. "모르는 걸 부끄러워 마라! 계속 모르는 걸 부끄러워해라. 그러니 뭐든 물어봐라."


화려하나 차가운, 나와는 물과 기름 같은 그 바닥에서 이십여 년을 살아내다 보니 어디를 가나 혼자 덩그러니, 그러나 꿋꿋이 서 있는 나무들을 향해 셔터를 누르는 버릇이 생겼다. 게다가 사람들은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실 진짜 죽었을지도 모르겠는, 잎이 없거나 적은, 가시만 수북이 가진 그런 나무들이 더 좋았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잎조차 없이 모진 모래 바람을 견뎌내는 그 나무들이 내겐 너무 아름답게 보이고, 그래서 난 그들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나도 꿋꿋이 버텨야지! 다른 나무와, 다른 사람과 좀 다르면 어때? 나는 나다운 사진을 찍으면 되는 거지.


[조선희의 프레임] 사막의 나무 원본보기 아이콘


그들에게는 시골 촌뜨기, 까맣고 못생긴 여자 어시, 심부름꾼에 불과할지라도 이겨내야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늘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면서 내 몸에도 나를 보호하기 위한 가시가 돋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도 요즈음 아이들처럼 유리 멘탈로 끝나버릴 수 있었지만, 나의 투박한 말투와 무식한 용감함이 나를 보호해주는 가시가 되어준 거였다.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보호 가시가 누군가에게는 상처도 줬고, 그래서 다시 내게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리고 가끔, 인간관계에 대해 어떤 사건이 생겼을 때, '혹시 내가 이상한 건가?' '내가 너무 과민 반응인가?' '내가 너무 다른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 내가 너무 다른 거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삶에 적응하느라 같은 종임에도 자신을 다르게 키운 나무처럼 말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며 셔터를 누르는 나무들은 다르게 생기지 않았던가? 다르게, 특이하게 생겼기에 난 그들을 향해 셔터를 누르지 않았던가?


모래 바람을 이겨냈기에 그런 굵은 가지를 가질 수 있었다. 잎이 적거나 없어서 미니멀한 아름다움이 풍겨 나오지 않는가?


나도 그러는 중이다. 나의 사진 가지를 더 많게 키우기보다는 더 두껍게 키우는 중이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것보다는 그 사랑을 더 깊게 만드는 중인 거다. 사막의 나무가 잎의 수를 줄이고 더 두껍게 하듯이.


조선희 사진작가 / 경일대 사진영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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