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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히틀러 오른팔을 속인 '위작 영웅'

최종수정 2019.10.16 15:21 기사입력 2019.10.16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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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모르핀 중독 판 메이헤런, 나치에 동조·협력한 미술 사기꾼
전문가 자만심 등 허점 노려 사기…나치의 수괴 속여 민족영웅 행세

이미혜 예술사저술가·경성대 외래교수

이미혜 예술사저술가·경성대 외래교수

미술품 위조의 역사는 유구하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조각을 땅에 묻었다가 그리스·로마 시대의 유물로 속여 파는 일이 횡행했고 당대 작품도 위조 대상이 되었다.


독일의 판화가 알프레히트 뒤러(1471~1528)는 역사상 최초로 저작권 소송을 제기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위조범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자기 이름의 머리글자 A와 D로 독특한 서명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서명까지 위조한 판화가 나도는 판국이었다. 그럼에도 재판관은 모방작임을 밝히면 팔아도 괜찮다고 판결했다. 뒤러에게는 위조품이 나올 만큼 중요한 화가로 여겨지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라고 충고했다. 뒤러는 화가 났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미술품 위조범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1930~1940년대에 네덜란드 출신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1632~1675)를 위조한 한 판 메이헤런(1889~1947)일 것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체포됐다. 위조가 발각된 것이 아니라 미술품을 나치 독일에 반출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판 메이헤런은 재판 과정에서 나치에 넘긴 명작이 사실은 자기가 그린 것이라고 실토해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나치에 대한 협력죄보다 위조죄 형량이 가벼웠던 것이다. 그는 가짜 페르메이르를 아돌프 히틀러의 오른팔 헤르만 괴링에게 팔았다.


대중은 판 메이헤런이 나치의 수괴를 통쾌하게 속였다며 열광했다. 변호사들은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 판 메이헤런이 자기를 무시한 전문가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 위작을 그렸을 뿐 악한 의도는 없었다고 옹호했다. 판 메이헤런은 사기꾼에서 일약 민족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여기까지가 대중에게 알려진 신화다. 미국의 미술사학자 토머스 호빙은 다른 버전의 얘기를 들려준다. 그는 10년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장을 지내고 미술품 감정가로 활약하며 많은 책도 저술했다.


호빙에 따르면 판 메이헤런은 이류 화가이고 위작 솜씨도 미술품 감정가라면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는 정도였다. 판 메이헤런의 성공 비결은 전문가의 자만심과 미술품 감정의 허점을 공략한 데 있었다. 전문가들은 판 메이헤런의 사기극에서 그가 바라는 역할을 알아서 해주었다.

한 판 메이헤른 '간음한 여인', 1942년, 크기 불명, 보이만스 판 보이닝헌 미술관, 네덜란드 로테르담(괴링이 속아 넘어간 그림)

한 판 메이헤른 '간음한 여인', 1942년, 크기 불명, 보이만스 판 보이닝헌 미술관, 네덜란드 로테르담(괴링이 속아 넘어간 그림)


판 메이헤런은 형편없는 인간이었다. 알코올·모르핀 중독자인 데다 사기와 속임수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으며 나치에 동조하고 협력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애국적인 영웅으로 둔갑했을까.


판 메이헤런은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재주를 타고났다. 하지만 그의 재능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킬 만한 창조적 에너지는 갖고 있지 못했다. 1914년 미술학교를 마친 후 아카데미풍 그림으로 그럭저럭 성공했으나 곧 밀려든 아방가르드 물결로 그의 화풍은 시대에 뒤진 것이 되었다.


그는 아방가르드 미술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다. 그는 1930년대 극우 미술단체에 가입해 인종적 편견으로 가득 찬 글을 썼다. 아방가르드 미술 탄압에 나선 나치를 지지하기도 했다.


타락한 판 메이헤런은 한 미술품 복원가와 손잡고 그림을 위조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선택한 화가는 네덜란드의 프란스 할스(1581~1666)였다. 조악한 모작이었으나 할스 전문가로 자처하는 호프스테데 더 흐루트라는 수집가를 속일 수 있었다.


간이 커진 두 동업자는 다른 17세기 화가로 범위를 넓혔다. 돈이 굴러 들어왔다. 그러나 아브라함 브레디우스라는 전문가가 수상한 점을 눈치챘다. 그는 흐루트가 경매에 내놓은 할스 그림이 위작임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창피당한 흐루트는 조용히 그림을 거둬들였다. 위작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는 거론되지 않았다. 흐루트는 사기꾼을 찾기보다 자기의 멍청한 실수를 사람들이 잊어주기만 바랐다.


판 메이헤런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앞으로 더 신중하게 사기를 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동업자와 헤어진 뒤 다음 위작을 내놓을 때까지 4년 동안 잠복하며 준비했다.


이번에 고른 화가는 페르메이르였다. 페르메이르는 네덜란드의 황금기로 불리는 17세기 풍속화가로 두 세기 동안 잊혔다가 19세기 중반 재발견되었다. 20세기 들어 그에 대한 관심은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페르메이르의 작품은 희소성이 있어 고가에 거래된다. 초기 그림과 원숙기 사이에 십여 년의 공백이 있는 것도 유리한 점이었다. 미술사학자들은 이 공백기에 페르메이르가 이탈리아에서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1573~1610)의 화풍을 익혔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판 메이헤런이 만든 조잡한 할스가 가짜임을 밝혀낸 브레디우스는 한술 더 떠 카라바조풍의 초기 페르메이르 그림이 나타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장담했다. 실제로 그는 페르메이르의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를 발견한 공적이 있었다. 브레디우스는 페르메이르의 종교화가 이것 하나뿐일 리 없다고 보고 조만간 다른 작품이 나타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신념으로 말미암아 브레디우스는 본의 아니게 판 메이헤런의 사기극을 거들게 되었다.


판 메이헤런은 페르메이르에 대한 연구서와 미술 관련 전문서를 독파했다. 네덜란드 미술사학자와 큐레이터들의 성향에 대해서도 충분히 조사했다. 그리고 1936년 꼬박 1년 만에 '엠마오 집에서의 저녁식사'를 완성했다.

한 판 메이헤른 '엠마오 집에서의 식사', 1937년, 118x130.5cm, 보이만스 판 보이닝헌 미술관, 네덜란드 로테르담(브레디우스가 페르메이르 진품이라고 처음 판정해준 그림. 브레디우스의 옹호 덕분에 판 메이헤른의 위조 행각은 탄탄대로를 달렸다.)

한 판 메이헤른 '엠마오 집에서의 식사', 1937년, 118x130.5cm, 보이만스 판 보이닝헌 미술관, 네덜란드 로테르담(브레디우스가 페르메이르 진품이라고 처음 판정해준 그림. 브레디우스의 옹호 덕분에 판 메이헤른의 위조 행각은 탄탄대로를 달렸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 1654~1656년, 158.5x141.5cm,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영국 에든버러(브레디우스가 찾아낸 페르메이르의 그림. 페르메이르 작품 가운데 종교화로는 유일하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 1654~1656년, 158.5x141.5cm,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영국 에든버러(브레디우스가 찾아낸 페르메이르의 그림. 페르메이르 작품 가운데 종교화로는 유일하다.)



브레디우스라면 반드시 페르메이르의 공백기를 메워줄 그림에 반색할 것이었다. 판 메이헤런은 할스를 위조할 때와 달리 기존 작품을 본떠 그리는 방식은 버리고 존재하지 않는 그림을 새로 그렸다. 대담한 짓이지만 한번 성공하면 비슷한 그림을 계속 그려 팔 수 있으므로 유리했다.


1937년 판 메이헤런은 이름난 변호사에게 부탁해 '엠마오 집에서의 저녁식사'를 브레디우스에게 감정받게 했다. 법률은 잘 알아도 미술은 몰랐던 변호사는 판 메이헤런이 둘러대는 그럴듯한 거짓말에 넘어가 그림을 싸들고 브레디우스를 찾아갔다.


브레디우스는 자기가 전부터 나타나리라 예언한 그림을 눈앞에서 보고 흥분했다. 한때 유능한 미술 전문가였으나 이제 그는 팔십 세가 넘은 고집 센 노인일 뿐이었다. 눈도 거의 안 보이는 상태였으나 자기의 감식안을 자신했다.


지금은 작품의 진위를 감별하는 과학적 수단이 많이 발달했으나 당시만 해도 전문가가 육안으로 보고 한두 가지 기초적인 시험만 통과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브레디우스는 권위 있는 미술 잡지 '벌링턴'에 기고했다. 새로 발견된 페르메이르의 걸작을 격찬하는 글이었다. 그는 이 보물이 국외로 유출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 주위의 예술 애호가들을 설득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예술 후원자 모임인 렘브란트협회가 그림을 사서 보이만스반뵈닝겐 미술관에 기증했다. 브레디우스도 기금을 보탰다.


판 메이헤런은 여덟 점의 페르메이르 위작을 제작했다. 보이만스반뵈닝겐 미술관이 두 점,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이 한 점을 사고 괴링도 한 점을 가져갔다. 이 탐욕스러운 나치 수괴는 그림값 대신 독일군이 네덜란드에서 빼앗아간 200점의 그림을 주었다.


지난해 여름 필자는 로테르담을 방문했다. 보이만스반뵈닝겐 미술관은 호기심 많은 관람객을 위해 '엠마오 집에서의 식사'도 전시하고 있다. 그림 앞에 서니 이걸 진품으로 믿은 전문가들의 머릿속이 궁금해졌다.


이 엉성한 그림을 처음부터 의심한 비평가들도 있었다. 그러나 옹호자들은 페르메이르의 그림이 독일로 빠져나가도 좋겠느냐는 애국 논리로 이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1940년 네덜란드가 독일군에 점령되었다. 그림에 대한 한가한 논란은 중단되었다. 판 메이헤런은 남프랑스 코트다쥐르로 피난 가서 고급 저택을 구입하고 호화롭게 살았다.


판 메이헤런은 1945년 나치 협력죄로 체포되었다. 페르메이르 그림이라고 여겨진 '간음한 여인'을 괴링에게 팔았다는 죄목이었다. 판 메이헤런은 자기가 그림을 위조했다고 자백했다. 중대 범죄인 나치 협력죄를 모면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괴링을 속여 독일군 수중에 들어간 수많은 그림도 되찾아왔으니 자기는 애국자라고 주장했다.


네덜란드 언론이 판 메이헤런의 파렴치함을 보도하려는 순간 한발 앞서 미국의 '새터데이이브닝포스트'가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적어 내보냈다. '헤르만 괴링을 속인 남자'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사기꾼은 나치에 저항한 영웅이 되어 있었다. 대중은 영화 같은 얘기에 열광했다. 다른 언론 매체도 대중의 입맛에 맞춰 잇따라 그를 우상화했다. 판 메이헤런의 위조죄는 희석되었고 나치에 협력한 그의 과거도 지워졌다.


판 메이헤런은 1년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건강 악화로 풀려나 1947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 자신은 파산 상태로 죽었지만 부인은 남편이 돌려놓은 재산으로 아흔한 살까지 사치스럽게 살았다. 진정한 승자는 따로 있다.


예술사 저술가·경성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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