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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 맹시(盲視)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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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에서 '만인지상'이라면 단연 풍도를 꼽는다. 당나라 멸망 후 5대 10국 시대를 관통한 인물이다. 전란의 암흑기에 다섯 왕조, 열한 명의 황제를 섬겼다. 30년간 고위관직을 거쳤고 그 중 20년간 재상을 지냈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며 그를 폄훼했지만, 역사연구가 란즈커는 최근 펴낸 '참모의 진심-살아남은 자의 비밀'에서 후하게 평가했다. "권력을 탐하지 않고 백성을 궁휼히 여겼다." 하나 더 추가하면, 봐도 못 본 척 알아도 모른 척 하는 자세다. 좋게 말하면 균형감이고, 비뚤어 보면 계산적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의도적 맹시'라고 한다. 부담스러운 결과를 회피하기 위해 불편한 세부 정보를 외면하는 뇌의 반응이다. 농구장에서 사람들이 공을 몇번 패스하는지 세느라 고릴라 복장의 등장 인물을 눈치채지 못하는 '부주의 맹시'와는 다르다. 후자가 다른 곳에 집중하느라 눈 앞의 무언가를 놓치는 것이라면, 전자는 의도하는 결과를 위해 불편한 과정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의당은 어느 쪽일까. 문재인 대통령 아들 준용씨의 취업특혜 폭로가 자작극으로 드러났지만 의혹은 여전하다. 국민의당의 주장은 이렇다. 이유미씨가 제공한 정보를 '개연성이 매우 높은' 사실로 믿었다는 강변. 다만 선거에 집중하다보니 검증이 소홀했다는 항변.

이 주장대로라면, 대선 판도를 뒤바꿀 수 있는 판도라 상자를 당원 몇명의 말만 듣고 열어봤다는 얘기다. 넌지시 '부주의 맹시'를 자백하는데, 다른 시각도 있다. 정상적인 대선 캠프라면 판도라 상자를 그리 쉽게 열어봤겠느냐는 의심부터, 조작 가능성이 있는데도 폭발력만 믿고 검증을 소홀히 한 것이라는 의혹까지. 결국 혐의는 '의도적 맹시'로 향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논란도 마찬가지다. 양국 정상 회담 직후 미국이 '재협상'을 언급하자 우리 정부는 "트럼프 대통령의 국내 정치용 발언"이라고 평가절하했다. 하지만 며칠 뒤 정부 발언은 '개정'으로 바뀌었고, 19일 발표한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서는 'FTA 재협상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로 나아갔다.

시계를 3주 전 한미 정상회담으로 돌려보자. 우리 정부는 미국측 의도를 정말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1%의 가능성이 있는데도 외면했던 것일까. 부주의 맹시라면 전술적 실수이고, 의도적 맹시라면 전략적 실패다. 아무쪼록 실패가 아닌 실수였기를. 서툴지만 그래도 솔직하다는 점에서.
이정일 산업부장 jayle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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