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쌀쌀해진 기온과 노천에서 오랫토록 앉아야 하는지라 모자와 목도리까지 챙겼다. 주말 단풍행락 인파로 인하여 길은 온통 정체의 연속이다. 천년 은행나무 밑에서 진행되는 색다른 행사는 가깝지 않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내도록 만들었다. 황금빛 은행잎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광고 장면을 상상하며 꼬리에 꼬리를 문 차량 뒤로 이어진 꼬리의 길이를 늘이는 데 기꺼이 합류한 것이다. 넉넉하게 예상시간의 두 배쯤 여유를 두고 출발했지만 휴게소 한번 들르지 못한 채 부지런히 달려서야 겨우 약속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은행나무 이야기도 빠질 수는 없는 일이다. 1970년대‘수출입국’시대에는 은행나무 잎을 수집하여 의약품의 원료로 해외시장에 팔았다. 한방에서는 은행열매가 기침에 좋다고 하면서 구워먹도록 처방했다. 절집의 거대한 은행나무에 관한 전설은 다소 정치적이다. 신라 망국의 한을 품은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입산하며 꽂아놓은 지팡이가 은행나무가 되었다거나 혹은 나라에 어려움이 생기면 울음소리를 낸다는 영험을 강조하는 형식을 띤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피신하면서 국태민안의 기도를 한 인연으로 나라의 안녕(寧國)을 유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품고 있는 영동 영국사(寧國寺) 은행나무는 매년 가을 당산제를 통해 마을공동체 수호신 노릇까지 마다하지 않고 있다.
아무래도 은행나무의 본가는 공자(BC 551~479) 집안이라 하겠다. 서원과 향교에는 하나같이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약속이나 한 듯 자리잡았다. 공자께서 은행나무 그늘아래에서 평상을 펴고 제자를 가르쳤다는 행단(杏壇)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최초기록인“공자께서...행단 위에 앉아서 쉬었다… 제자들은 책을 읽고(..休坐乎杏壇之上.弟子讀書...)”라는 내용이 ??장자(莊子)??에 나온다. 유가서가 아니라 도가서의 기록인 것이 아이러니이긴 하다. 하긴 제자백가(諸子百家)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또 서로 필요한 말을 서로 인용하는 열린 문화권을 추구했으니 굳이 영역을 나누어 볼 것도 없긴 하다.
무엇이든지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기 마련이다. 은행나무도 마찬가지다. 모두 좋은데 한 가지가 문제다. 바로 향기롭지 못한 냄새다. 조선시대에 윤탁(尹倬)이라는 선비는 행단(杏壇)을 생각하며 손수 은행나무 두 그루를 강당 앞뜰에 심었다. 세월에 흐르면서 큰 나무가 되었고 큰 그늘은 여름에 평상을 펴기에도 좋았다. 하지만 가을이 문제였다. 열매가 땅에 떨어지면서 엄청난 악취를 풍겼다. 게다가 수복(守僕, 일꾼)들이 나무 주변을 따라다니며 은행을 줍느라고 사당 앞에서 낄낄대며 떠드는 소리가 담 너머까지 울렸다. 성균관의 관원이 제사를 드리면서 소란스럽게 한 것에 대하여 사죄의 뜻을 고하니 이로부터 다시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신이한 일이라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하는 이야기다.
전국 가로수의 40%가 은행나무라고 한다. 정치적, 혹은 교육적인 거창한 이념 때문에 심은 것이 아니라 매연 속에서 공기정화기능이 뛰어나고 생명력이 강하다는 식물학적 강점 때문이다. 하지만 고약한 냄새는 예나 지금이나 골칫거리다. 나무를 감동시켜 열매 맺기를 중단시킬 만한 신통력이 없다면 처음 심을 때 열매가 열리지 않는 숫나무 묘목을 잘 골라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름비는 전남 해남의 고택을 녹우당(綠雨堂)으로 만들지만 가을비는 북촌 한옥을 황우당(黃雨堂)으로 만들 터이다. 그 날은 코는 완전히 닫고 눈만 크게 열고서 황금낙엽을 밟으려 가야겠다.
원철 스님(조계종 포교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