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한제국 제3대 프랑스공사 민영찬의 딸, 민용아다. 1938년 겨울에 이 그림을 그렸을 때 내 나이는 스물 아홉 살(1910년생)이다. 이미 결혼한 몸(남편 서정식)으로 남들 앞에 나서기 민망함이 없지 않으나, 스코틀랜드 출신의 여류화가 기덕(奇德, 엘리자베스 키스, Elizabeth Keith, 1887-1956)이 포즈를 취해달라기에 슬쩍 비킨 듯 옆모습으로 서보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영어를 즐겨 익혔기에 기덕과는 통역 없이 얘기할 수 있을 만큼 바일링구얼이다. 기덕은 만세운동이 있던 1919년 봄에 이 땅을 밟은 뒤로 수십년에 걸쳐 여러 차례 이곳에 들렀던지라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조선의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와 유치원 동기동창이다. 황제는 옹주를 위해 조선에서 처음으로 유치원을 만들었는데, 나도 거기 함께 입학한 것이다. 1916년부터 25년까지 10년간 덕수궁 준명당을 개조한 유치원에 함께 다녔다. 나는 옹주와 함께 다닌다는 공로로 황실로부터 장학금 100원을 받기도 했다. 우리는 옹주를 복녕당 아기씨로 불렀다. 아기씨는 가끔 유치원에서 오줌을 싸기도 했다. 다 옛날 이야기다. 아기씨의 말년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린다.
기덕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과 풍경들을 먼저 들이마십니다. 아니 들이마신다는 말은 충분하지 않아요. 나는 그 안에서 아예 목욕을 합니다. 그 풍경 속으로 녹아들어가 아예 풍경과 하나가 되는 느낌을 가집니다. 그런 뒤 그 느낌을 종이 위에 재현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작업이 시작되죠.”
그녀는 나를 ‘백동자도(아이들이 노는 그림)’가 그려진 조선병풍 앞에 서게 하고, 실내인데도 굳이 운혜(雲鞋)를 신게 했다. 코끝만 살짝 나온 신발의 멋을 그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운혜는 분홍비단과 녹색비단, 붉은 비단을 덧기워 만든 제비부리같은 신발인데, 푸른 색 구름무늬가 있어 운혜라 부른다. 나를 그린 그림은 ‘민씨가의 규수’란 이름의 작품이 되었는데, 사람들은 나를 들여다보면서 조선의 복식사나 병풍의 특징 따위를 말할 뿐, 일제의 폭압이 짙어지던 시절 질식해버린 황실가문과 제국의 먹먹하고 참담한 표정을 읽어내지는 못하는 것 같다. 옷으로 감싼 몸뚱이보다 초점 잃은 조선의 자부심을 살펴주기를.
빈섬 이상국(편집부장. 시인)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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