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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천자]프루스트의 '베르사유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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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천자]프루스트의 '베르사유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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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아시아경제는 '하루만보 하루천자' 뉴스레터 독자를 위해 매일 천자 필사 콘텐츠를 제공한다. 필사 콘텐츠는 일별, 월별로 테마에 맞춰 동서양 고전, 한국문학, 명칼럼, 명연설 등에서 엄선해 전달된다. 오늘은 프랑스의 대문호 마르셀 프루스트의 초기 산문시를 모은 <시간의 빛깔을 한 몽상> 중에서 베르사유 궁전을 노래한 부분을 가져왔다. 글자 수 1027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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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시간을 다 한 가을은 이따금 태양으로 다시 덥혀지기까지 해서 마지막 남은 빛깔마저 빠르게 잃어가고 있다. 오후 내내, 아니 아침나절마저도 석양의 찬란한 환상을 보여주었던 나무 잎들의 마지막 열정은 불타올라 이제 꺼져버렸다. 달리아, 홍황초, 그리고 노랑, 보라, 하양,

분홍색 국화꽃들만이 가을의 어둡고 황량한 지표 위에서 아직도 빛나고 있다. 저녁 여섯 시쯤, 어두운 하늘 아래 온통 잿빛으로 헐벗은 튈르리 공원을 가로질러 갈 때면, 어스름한 나무가지들마다 강렬하게 스며있는 절망이 느껴지고, 이때 갑작스레 눈에 띈 이 가을꽃 덤불은 어둠속에서 풍요로운 빛을 발하며, 타버린 재 같은 계절 광경에 익숙해진 우리 눈에 격렬한 관능적 쾌감을 안겨주고 있다.


가을의 아침 시간은 훨씬 달콤하다. 아직 태양이 떠 있을 때 물가 테라스를 벗어나면, 커다란 석조 층계를 한 칸씩 내려가는 내 그림자가 보이기도 한다. 나는 여기에서 그 많은 문인들이 한 것처럼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싶지 않다. 베르사유여, 이제는 녹슬어버린 감미로운 이름이며, 숲과 드넓은 호수와 대리석들로 이루어진 위대한 왕의 무덤이며, 진정 귀족적이고 풍속을 문란케 하는 장소여. 당시에는 기쁨을 널리 퍼지게 한다는 미명하에 수많은 노동자들의 삶과 땀이 악용되었다는 오늘날 드는 우울한 회한마저도 우리네 마음을 어지럽힐 수 없구나.

나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당신의 이름을 들먹이고 싶진 않다. 하지만 나는 여러 차례 그대의 분홍색 대리석 수반을 술잔 삼아 술찌끼까지 마셔대며, 가을날의 취기 오르는 씁쓸한 달콤함을 떠벌이기까지 했다. 시든 잎과 썩은 잎으로 뒤섞인 대지는 멀리서는 노랑과 보라의 빛바랜 모자이크처럼 보였다. 촌락 근처를 지나가며 바람을 막으려 저고리의 깃을 세울 때, 비둘기들이 구구하며 우는 소리가 내게 들렸다. 도처에 회양목 냄새가 부활절 직전의 성지(聖枝) 주일인 듯 사람을 취하게 했다. 가을날 황폐해진 이런 정원 안에서 어찌 내가 봄날의 하찮은 꽃다발 하나라도 꺾을 수 있겠는가. 바람은 떨고 있는 장미의 꽃잎들을 수면 위로 내던지고 있었다.


-마르셀 프루스트, <시간의 빛깔을 한 몽상>, 이건수 옮김, 민음사, 1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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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경 기자 ikj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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