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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이 광산을 살아 나갈 수 있을까

최종수정 2022.01.07 15:27 기사입력 2022.01.07 12:37

조선인 강제동원 흔적 숨긴 채…세계유산 등재 추진 '日 사도광산'
에도막부 시절 은행이자 화폐공장, 1896년 미쓰비시 인수뒤 조선인 노역
보고서에 드러난 최소인원만 1140명, 그 중 절반 이상이 20대로 기록돼
급여·저축·보험 지급 않은 채 공탁, 조선인 광부들은 모른채 갱속 노역만
日, 등재 신청대상을 에도시대로 한정…부끄러운 역사에 사과 않고 은폐만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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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니가타현 사도섬에는 광산이 있다. 1601년부터 금광이 채굴됐다. 에도 막부에서 직영으로 지정해 은행이자 화폐공장 노릇을 했다. 모든 주조 공정은 수작업. 침수가 잦았으나 배수 기구를 도입하고 물길을 내어 조업을 이어갔다. 1615년~1634년 연간 금 생산량은 약 400㎏. 은도 약 40t씩 채굴됐다. 일본 문화청 문화심의회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지난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천 후보로 선정했다. 그런데 니가타현과 사도시는 신청대상 기간을 에도시대(1603~1867년)로 한정했다고 전해진다. 미쓰비시가 1896년 인수하고 수많은 조선인이 강제동원됐기 때문이다.


메이지와 쇼와시대를 배제하면 사도광산의 가치는 퇴색된다. 에도시대 유적이 오마항에 있는 봉행소(奉行所)와 일부 갱에 불과한 까닭이다. 도유갱, 수갱, 기계공장, 제련장, 선광장 등 유적 대부분은 19세기 말부터 지어졌다. 당시 일본은 발파용 다이너마이트와 암반을 뚫는 착암기로 채굴을 효율화했다. 선광(유용한 광석을 골라내는 일)과 제련 공정을 기계화해 생산력도 높였다. 1938년 조성된 부유선광장은 향상된 기술의 상징과 같다. 부유선광이란 회수가 어려운 작은 금·은 입자를 부유제로 떠오르게 해 회수하는 방법이다. 본래 구리 제련에 사용됐으나 사도광산에서 응용에 성공했다. 세계 최초 기술까지 세계유산 등재 추진 과정에서 생략한 건 조선인 강제동원 역사를 숨기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 실제로 니가타현과 사도시는 홍보 책자에서 1989년 폐광까지 다루며 한 번도 조선인 광부의 존재를 밝히지 않았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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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강제동원의 역사는 정혜경 아르고인문사회연구소 책임연구원이 2019년 '일본지역 탄광·광산의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 -미쓰비시광업 사도광산을 중심으로' 보고서를 쓰며 파악한 조선인 연초배급명부와 지정연령자 연명부에서 확인된다. 연초배급명부는 회사가 광부들에게 담배를 지급하며 작성한 명부다. 노무자들에게 밥은 주지 않아도 담배는 꼬박 챙겨줬다고. 여기에 기록된 조선인 수는 463명. 절반가량은 이름, 생년월일, 이동 정보, 작성 일자 등도 적혔다. 연령이 기재된 353명의 나이는 평균 28.8세(1944년 기준). 20대가 53%(187명)에 달한다. 지정연령자 연명부에는 100명의 이름, 생년월일(1901~1923년), 본적(함남·경북) 등이 적혔다.


이들의 흔적은 일본 국립공문서관에 있는 '조선인의 재일자산조사보고철-귀국 조선인에 대한 미불임금채무 등에 관한 조사결과'와 '경제협력 한국·105·조선인에 대한 임금미불채무조'에서도 나타난다. 정 연구원은 보고서에서 "두 건의 공탁기록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는 최소 조선인 1140명이 강제동원됐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이들의 급여, 저축, 보험금을 본인에게 주지 않고 공탁했다는 점이다."


1943년 4월 사도광산 조선인 광부의 평균 월수입은 83엔 88전. 노동에 필요한 도구 비용 등으로 공제돼 실제 입금액은 일부에 불과했다. 여기에는 강제저축도 적용됐다. 일제가 인플레를 억제하고 전비를 충당하는 동시에 도주를 저지하려고 사용한 방식이다. 사도광산 공탁기록에는 개인별 정보가 없다. 애초 노동의 대가가 다른 곳으로 새버린 셈이다. 조선인 광부들은 이를 모른 채 매일 갱 속에서 피땀을 흘렸다. 작업 중 사망한 조선인은 열 명. 별개로 1942년 12월 갱부 두 명은 제자(梯子)를 가설하던 중 암석 면에서 떨어진 돌에 맞아 두개골이 파열됐다. 사고를 피해도 대부분 진폐증으로 고생해 오래 살지 못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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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같은 삶을 구술한 기록이 있다. 주인공은 1940년 11월 사도광산에 동원된 임태호씨. 사도섬에 도착해서야 징용이란 사실을 깨달았단다. 숙소에서 1시간 30분을 걸어 광산에 도착할 때마다 공포에 떨었다고. "'오늘은 살아서 이 지하를 나갈 수 있을까?' 생각하며 마음을 졸이고 살았다. 사망자에게 인간 대접은 물론 조의도 없었다. (…) 지하에서 발판이 떨어져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정신이 든 곳은 병원이 아니라 숙소의 이부자리였다. 허리를 강하게 맞아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열흘 정도 누운 채 지냈다. 간신히 일어날 수 있게 되자 다시 일터로 돌아가라고 했다. 병에 걸려도 이틀 이상 쉴 수 없는데 열흘이나 일하지 않았다며 더는 휴식을 용납하지 않았다."


임씨는 히로시마로의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구술을 마치며 "사도광산에 있었던 사람이 한 명이라도 살아있는 동안에 성의 있는 진정한 사죄를 받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전후 반세기 이상이 지났으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본 정부로부터 진심 어린 말 한마디를 들은 적이 없다. 죽은 동료들도 지금은 모두 성불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임씨는 1997년 5월 사망했다. 그로부터 25년이 흘렀으나 일본 정부나 미쓰비시는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끄러운 역사를 숨기면서까지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할 조짐이다. 일본 정부는 문화심의회가 선정한 추천 후보를 한 번도 외면하지 않았다. 유네스코 제출 마감일은 내년 2월 1일. 우리 정부는 단호히 대응하겠다고 못 박았다. 지난달 추조 가즈오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장을 외교부 청사로 초치해 항의한 외교부 당국자는 "일본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취소를 요구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세계유산 신청서 내용을 분석해 부적합한 이유와 강제노역을 포함한 역사 해석의 필요성을 유네스코와 전문가 기구에 적극적으로 설명하겠다"며 "세계유산위원국을 대상으로 전방위적 외교 교섭도 전개하겠다"고 말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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